산속 무녀들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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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한아의 주전자

볕이 잘 드는 마루, 바람이 머물다 가는 툇마루에 앉아 루아는 큰 무녀님의 조용한 다과를 지켜보고 있었다. 신사에 돌아온 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큰 무녀님의 일상은 늘 경건하고 평화로웠다. 특히 오후의 차를 마시는 시간은 루아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었다. 큰 무녀님의 손길 하나하나에 배어나는 정갈함은 보는 사람의 마음마저 고요하게 만들곤 했다.

문득 루아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큰 무녀님은 차를 마실 때 늘 은은한 광택이 도는 낡은 도자기 주전자를 사용하셨다. 그런데 그 주전자에 직접 찻잎과 물을 넣어 차를 우리는 것이 아니었다. 큰 무녀님은 옆에 놓인 또 다른, 훨씬 투박한 질감의 검은색 옹기 주전자를 가져오셨다. 그리고 그 옹기 주전자에서 먼저 맑은 찻물을 도자기 주전자로 따랐다. 은은한 김이 피어오르는 찻물이 도자기 주전자 안에서 찰랑였다. 그리고는 비로소 그 도자기 주전자에서 자신의 찻잔으로 차를 따랐다.

이상했다. 왜 굳이 두 개의 주전자를 사용하는 걸까? 바로 잔으로 따르거나, 아니면 도자기 주전자에 직접 차를 우려도 될 텐데. 꼭 한 단계를 거치는 듯한 모습이었다. 루아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큰 무녀님, 저 주전자는… 무슨 특별한 것이라도 있나요?”

루아의 시선이 낡은 도자기 주전자에 닿았다. 큰 무녀님은 차를 따르던 손길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루아를 보았다. 늘 온화한 미소였지만, 그 속에 아주 오래되고 깊은 슬픔 같은 것이 살짝 스치는 듯했다.

“그러고 말고, 루아.”

큰 무녀님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평소보다 깊은 울림이 있었다.

“이 주전자에게는 아주 오랜 이야기가 담겨 있단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듣기에도, 말하기에도 아주 어려운 이야기일 텐데, 괜찮겠니?”

루아는 잠시 망설였다. 큰 무녀님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무게가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루아는 알았다. 큰 무녀님께서 ’어려운 이야기’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세상의 균형을 지키는 무녀로서 반드시 알아야 할, 어쩌면 무녀의 존재 이유와도 맞닿아 있는 진실일 때가 많다는 것을. 루아는 숨을 고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습니다. 큰 무녀님.”

큰 무녀님은 다시 온화한 미소를 지으셨다. 그리고는 자신의 앞에 놓였던 여벌의 찻잔 하나를 들어 루아에게 내밀었다.

“그럼, 차를 함께 마시면서 이야기하자꾸나.”

따뜻한 찻잔이 루아의 손에 들렸다. 그 안에서 옅은 갈색빛의 찻물이 고요히 흔들리고 있었다.[B:1]


큰 무녀님의 시선은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지금으로부터 칠백여 년 전, 시간이 겹겹이 쌓여 먼지처럼 가라앉은 옛날을 향했다. “그때는 말이다, 루아.” 큰 무녀님의 목소리는 오랜 기억을 더듬는 듯 나직했지만, 그 안에는 형언할 수 없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지금보다 무녀의 수가 훨씬 많았단다. 너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루아는 눈을 크게 떴다. 지금도 무녀의 수는 적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큰 무녀님의 말은 그 아득한 시간 속에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무녀들이 존재했음을 암시하는 듯했다. 큰 무녀님은 고요히 말을 이었다.

“수백 명은 족히 되었을 게다. 온 세상에 흩어져 신의 뜻을 받들고, 때로는 각자의 자리에서 작은 균형을 맞추었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처럼 신의 목소리가 들려야만 신사로 이끌리는 폐쇄적인 방식이 아니었어. 그때는 영감이 있는 아이들이 지금보다도 훨씬 많았거든. 하늘의 소리를 듣고, 땅의 속삭임을 느끼는 이들이 넘쳐났다. 그러니 영감이 있고, 무녀가 될 기본적인 조건을 충족한 자가 스스로 원한다면,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지. 신사 또한 그렇게 많은 무녀들을 품어 안기 위해 지금보다 훨씬 많은 건물을 필요로 했단다.”

루아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 이 신사는 본당과 몇 채의 부속 건물 외에는 드넓은 빈 공간이 대부분이었다. 푸른 숲과 잘 가꾸어진 정원이 한없이 펼쳐져 있었다. 큰 무녀님의 말대로, 현재의 이 신사 부지 전체가 옛 무녀들의 번성했던 흔적인 셈이었다. 큰 무녀님의 시선은 마치 그 빈 공간에 과거의 건물과 수많은 무녀들의 그림자를 그려내듯, 아득한 회상에 잠겨 있었다.[B:2]

큰 무녀님의 고요한 목소리가 마루에 낮게 깔렸다. “하지만 평화로운 시절이 영원할 수는 없는 법이지. 긴 평화의 시대가 끝나고, 이 땅에 거대한 혼란의 시기가 찾아왔단다.”

찻잔 속 찻물이 잔잔하게 흔들렸다. 큰 무녀님의 시선은 아득한 수평선을 응시하듯 멀리 있었다. “하늘과 땅의 기운이 뒤틀리고,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도 어둠이 짙어졌다. 끊임없는 전란과 역병, 그리고 기아가 이 땅을 휩쓸었어. 백성들은 고통에 신음했고, 결국 그 혼란의 끝에서 이 땅의 나라가 새로이 세워질 정도였지.”

루아는 큰 무녀님의 말을 듣는 순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 땅의 나라가 새로이 세워졌다’는 것은 분명 조선의 건국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지금 큰 무녀님이 말씀하시는 ’혼란의 시기’는 고려 후말의 격동적인 정세를 가리키는 것이리라. 루아의 심장이 낮게 울렸다. 무녀들이 그런 시대의 한가운데 있었다니.

“스스로 신사를 찾아온 이들은 말이다, 루아.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시절에는 신의 뜻을 잘 받들어 모셨단다. 허나 혼란한 때에는 마음속에 동요가 일고, 무녀의 강력한 힘을 악용하려는 유혹을 떨치기 어려웠지.”

루아는 의아했다. 무녀의 변신 능력은 사물에 대한 세밀한 이해도가 필수적이라고 배웠다. 어설프게 변신하면 세상에 들키기 십상일 터인데, 어떻게 ’악용’할 수 있단 말인가. 루아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하지만… 무녀의 변신 능력은 대상에 대한 세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걸 모르는 상태에서 멋대로 변신하면 오히려 들키기 쉽지 않나요?”

큰 무녀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에게 들키지 않고 어엿하게 세상에 녹아들려면 그래야만 하지. 너희가 지금 배우는 것처럼 완벽한 충실도를 구현해야 해. 하지만… 그런 것을 무시하고 그저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단다.”

그녀는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말을 이었다. “형체만 어설프게 흉내 낸 거대한 괴물의 모습으로 변하여 성을 부수거나, 형체는 사람이되 마치 바람처럼 빠르게 움직여 도적질을 하거나, 단단한 바위가 되어 길을 막거나… 이해 없이도 폭력적인 힘을 휘두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 세상은 혼란스러웠고, 사람들은 이변에 익숙해져 갔다. 무녀가 인간 세상의 이치를 이해하고 균형을 지키기 위한 능력을, 그저 파괴와 혼돈을 위한 도구로 쓴다면… 그 파급력은 상상 이상이었단다.”

루아는 큰 무녀님의 말에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자신이 아는 무녀의 능력과는 너무나도 다른, 그야말로 재앙적인 가능성이었다. 세밀한 이해 없이도 파괴적인 힘을 휘두를 수 있다는 사실에 몸서리가 쳐졌다.

“처음에는 한 무녀가 그런 유혹에 빠졌지. 자신이 힘을 써도 별 문제가 없어 보이자, 둘이 더 빠져들었고. 넷, 여덟… 그렇게 순식간에 대부분의 무녀가 그 유혹에 굴복하는 사태가 발생했단다.”[B:3]

하늘은 무녀들에게 등을 돌린 듯했다. 세상 곳곳에서 무녀에 대한 불신과 원망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들의 능력이 세상을 구원하기는커녕, 오히려 혼돈을 부추기는 도구가 되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수백 명에 달했던 무녀들 중 이제 마지막까지 큰 무녀님 곁을 지키고 있는 건 오직 한 명, 서리뿐이었다.

서리는 젊은 무녀였다. 하지만 그녀의 재능은 그 어떤 무녀도 따라올 수 없었다. 직관적으로 물건을 보고 그 원리를 꿰뚫어 정확히 복제하는 데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해도 면에서 그녀를 능가하는 이는 없었으니, 이해도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힘을 휘둘러 혼란을 부추기는 다른 무녀들에게 반감이 갈 수밖에 없었다. 저들이 사용하는 방식은 무녀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행위였다.

하지만 서리 역시 다른 종류의 유혹에 시달리고 있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이 막강한 힘을, 이 망가진 세상을 바로잡는 데 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유혹이었다. 무녀는 강력한 힘 때문에 전면으로 나서면 안 된다는 원칙이 있었다. 신의 균형을 거스르지 않고 막후에서 조용히 움직여야 한다는 철칙이었다. 그러나 서리의 눈에는 그 원칙이 무녀들의 무능력과 비겁함을 정당화하는 핑계처럼 보였다. 세상은 불타는데, 자신들은 그저 바라만 봐야 하는가? 좋은 의도였지만, 그녀의 내면에서는 그 원칙을 깨뜨리고 싶은 강한 충동이 일었다.

어느 날 밤, 고요한 달빛이 신사 마루에 스며들 때였다. 서리는 큰 무녀님, 한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큰 무녀님… 아니, 한아님.”

서리의 목소리에는 깊은 번민이 서려 있었다.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은 이미 파멸 직전입니다. 저희가… 저희의 힘을 올바른 방향으로 써서 이 혼란을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큰 무녀님은 눈을 감고 고요히 숨을 쉬었다. 이 고뇌는 그녀가 수십 년, 아니 수백 년간 지켜본 수많은 무녀들의 번민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서리의 말에는 다른 이들에게서는 느껴지지 않던 진정한 고통과 절망이 담겨 있었다.

“서리야. 너의 마음은 안다. 고통받는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너의 열망이 얼마나 강한지도 잘 알고 있지. 허나, 그 열망이 지나치면 결국 오만으로 변질될 수 있단다.”

한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단호했다.

“무녀의 힘은 균형을 지키기 위한 것이지, 균형을 강제로 바로잡기 위한 것이 아니란다. 우리가 전면에 나서 세상을 바꾸려 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균형의 파괴가 될 뿐이야.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란다.”

“하지만, 한아님! 다른 무녀들이 저지르는 악행을 보십시오! 그들은 이해도 없이 그저 파괴를 일삼고 있습니다! 저희는… 저희는 달라야 하지 않습니까? 제가 가진 이해도로는 충분히…!”

서리의 목소리가 격앙되었다. 그녀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큰 무녀님은 천천히 눈을 뜨셨다. 그녀의 시선은 서리의 불안한 눈동자에 닿았다.

“옳은 의지로 시작했을지라도, 결국 그 칼날은 자신을 향하게 된단다. 너의 이해도가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신의 섭리를 거스르는 행위는 결국 파멸을 부를 뿐이야. 너는… 너는 그들처럼 되지 말거라, 서리.”

한아의 깊은 눈빛 속에는, 이미 모든 것을 겪어본 자의 아픔과 서리를 향한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었다.[B:4]


그날 밤, 서리는 결국 한아를 떠났다. 고요한 달빛 아래, 서리의 뒷모습은 단호하면서도 흔들리는 그림자처럼 보였다. 한아는 서리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불타는 세상을 외면하지 못하고, 자신의 힘으로라도 구원하고자 하는 그 열망을. 비록 그 길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한아는 그저 서리가 무사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아픈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아는 서리가 사라진 어둠 속으로 묵묵히 시선을 던졌다.

몇 달의 시간이 흘렀을까. 신사의 평화로운 정적을 깨고, 찢어지고 상처 입은 그림자들이 하나둘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신사를 떠났던 다른 무녀들이었다. 그들은 만신창이가 된 채였다. 옷은 넝마가 되었고, 얼굴에는 피와 흙먼지가 뒤섞여 있었다. 눈빛에는 공포와 절망,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혼란이 가득했다. 무녀의 강력한 변신 능력조차 무의미하게 만들 정도의 처참한 모습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묻기도 전에, 그들의 몰골 자체가 끔찍한 패배를 말해주고 있었다. 큰 무녀님은 그들의 눈에서, 그리고 그들이 끌고 온 처참한 세상의 기운에서 모든 것을 직감했다. 서리는 민중을 모아 무력 집단을 만들었고, 그 힘으로 고통받는 민초들을 지키려 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의 이상은 거대한 현실의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을 것이다. 다른 무녀들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과신하다가, 결국 사람들의 예측할 수 없는 지혜와 기지에 반격을 당한 것이 분명했다. 무녀의 초인적인 힘 앞에서도 인간의 지략과 결집된 의지는 때로는 무시무시한 반격을 가한다는 것을 그들은 뼈저리게 깨닫고 여기까지 도망쳐 온 것이었다.

큰 무녀님은 곧 신의 준엄한 심판이 그들을 덮칠 것임을 예감했다. 그녀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신의 목소리를 대리하여 무녀들을 책망했다.

“너희는 신께서 부여하신 힘을 오용하고, 세상의 균형을 흐트러뜨렸다. 인간의 영역을 침범하고, 너희의 오만함으로 세상을 더욱 혼란에 빠뜨렸다. 이제 너희는 신의 진노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시선은 바닥을 향해 있었고, 어떤 반항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리고 큰 무녀님의 시선은 마지막으로 만신창이가 된 서리에게 향했다.

“서리야. 너는 올바른 마음으로 시작했으나, 결국 그릇된 길을 택했다. 너의 오만함이 세상을 구원하려 했으나, 오히려 더 큰 상처를 남겼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큰 무녀님의 책망은 날카로운 비수처럼 그들의 심장을 꿰뚫는 듯했다. 그러나 무녀들은 신의 형벌을 직접 목격한 적이 없었다. 그들이 지금껏 겪어본 가장 큰 고통은 자신들의 힘이 무력화되는 것뿐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에게 내려질 형벌의 진정한 의미나 그 끔찍함이 어떤 것인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자신들이 서 있는 이 발밑의 땅이 곧 자신들을 삼킬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아직 알지 못했다.[B:5]

하늘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듯했다. 신의 준엄한 심판이, 드디어 내려지는 순간이었다. 만신창이가 되어 신사에 돌아왔던 무녀들은 몸이 굳어선 두려움에 떨었다. 억누를 수 없는 압도적인 기운이 그들을 덮쳤고,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모든 무녀의 몸이 일제히 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황홀하면서도 섬뜩한 빛이 걷히자, 그들이 서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무녀들의 육체는 온데간데없고, 대신 그 자리엔 모래알처럼 고운 흙더미나 작은 돌무더기만이 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전신이 가장 작은 입자들로 변화되어 세상의 바람에, 물결에, 혹은 땅속 깊이 흩뿌려지고 있었다.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 완전히 인식할 수 없는, 의식은 있으나 형태는 없어진 채 영원히 세상을 정처 없이 떠돌아야 하는 끔찍한 형벌이었다. 영겁의 시간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모든 무녀들이 사라진 자리에, 마지막으로 홀로 서 있는 것은 서리였다. 그녀는 눈앞에서 벌어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몸서리쳤다. 다른 무녀들이 받은 형벌의 끔찍한 함의를, 그녀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저것이 신의 심판이었구나. 영원히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그보다 더한 고통은 없을 터였다. 서리는 자신 또한 그렇게 될 것임을 알고 눈을 질끈 감았다. 두려움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때, 하늘에서 다시 거대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리. 너는 비록 그릇된 길을 걸었으나, 그 마음만은 어리석은 자들의 사리사욕과는 달랐노라. 이에 너에게는 영겁의 형벌을 면하노라.”

서리는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믿을 수 없는 판결이었다. 모든 무녀가 사라지고, 영원한 고통 속으로 던져졌는데, 자신만은 다르다니. 그녀의 눈에 회한과 안도가 뒤섞인 눈물이 맺혔다.

“너는 차를 담고 따라 보내는 주전자가 되어, 네가 어지럽히려 했던 세상에 겸허히 봉사하고, 그 행위를 통해 너의 오만함을 속죄하라.”

그 순간, 서리의 몸이 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육체가 서서히 단단하고 매끄러운 자기 재질로 변하는 고통 속에서도, 서리는 흐르는 눈물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자신에게 베풀어진 신의 관대함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차올랐다. 그녀는 그렇게 형벌의 대상으로, 동시에 속죄의 도구로 다시 태어났다.

큰 무녀 한아는 이 모든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고통과 슬픔, 그리고 체념이 뒤섞여 있었다. 서리마저 강제로 변신을 마쳤을 때, 하늘의 목소리는 한아를 향했다.

“그녀는 아흔 달이 아흔 번 차고 이지러지는 시간 동안 그 형벌을 감내해야 할 것이니, 너는 이를 지켜보고 그녀의 죄를 사하여지는 날을 기다릴지어다.”

하늘의 목소리가 멎었다. 큰 무녀님은 새로이 태어난, 은은한 광택이 도는 도자기 주전자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그리고는 루아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슬픔과 함께, 알 수 없는 세월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

“아흔 달이 아흔 번 차고 이지러진다… 그것이 정확히 얼마를 가리키는지는… 나도 모른단다, 루아.”[B:6]


루아는 찻잔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큰 무녀님이 들려준 이야기는 자신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진실이었다. 영겁의 형벌. 모래알이나 흙더미가 되어 세상에 흩뿌려진 채, 의식만 남아 영원히 떠돌아야 하는 존재론적 고통. 그것은 죽음보다도 더한 절망이었다. 루아는 공포에 질려 차가운 식은땀을 흘렸다. 자신이 그동안 막연하게 들어왔던 ’형벌’이라는 것이 이토록 참혹한 의미를 지녔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리고 곧이어, 그 끔찍한 형벌이 무녀 집단 전체를 휩쓸고 지나간 뒤의 상황이 퍼즐처럼 맞춰졌다. 신사를 떠났던 무녀들이 모두 형벌을 받고 사라진 후, 지금의 무녀 집단이 마치 폐허에서 다시 솟아나듯 서서히 재건되었을 터였다. 어째서 아린이 큰 무녀님에 비해 훨씬 젊은데도 현존하는 무녀들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지녔는지도 명확해졌다. 아린은 아마도 그 재건된 무녀 집단의 첫 번째 무녀였을 것이다. 조선의 건국과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으니, 대략 650세 안팎이었을 그녀가, 그 파괴와 혼돈의 시대 이후 신성한 부름을 받은 첫 씨앗이었던 셈이다.

마루 한편, 큰 무녀님을 찾아 뵈려다 얼떨결에 이 이야기를 모두 듣게 된 명아 역시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명아는 학구적인 무녀였다. 그녀는 고대의 기록들을 탐독하며, 때때로 인류 집단이 어떤 알 수 없는 대재앙으로 인해 극단적으로 수가 줄어든 뒤 다시 현재의 규모로 재건되었다는 설을 접한 적이 있었다. 명아는 그 이야기들이 그저 오래된 미신이나 전설이라고 치부했었다. 하지만 지금 큰 무녀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 ’설’이 바로 무녀의 역사와 맞닿아 있는 비극적인 진실임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었다. 무녀에게 일어난 이 거대한 사건이 어쩌면 인류 전체의 역사에도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생각마저 스쳤다.

큰 무녀님은 침묵 속에 차를 마시는 루아를 지켜보았다. 그리고는 루아에게 건네었던 주전자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그녀의 손길은 더없이 부드럽고 다정했다. 낡은 도자기 주전자의 매끄러운 표면을 쓰다듬는 큰 무녀님의 눈빛에는 오랜 세월의 회한과 깊은 사랑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주전자를 감싼 큰 무녀님의 손가락이 천천히 미끄러졌다. 그녀는 아련한 미소를 지으며 루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제, 내가 왜 이 주전자를 늘 곁에 두는지 알겠느냐?”[B:7]

정적 속에 큰 무녀님의 질문이 울렸다. 그 순간, 마루 한쪽에서 작은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숨어 듣고 있던 명아가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얼굴에는 미안함과 당혹감이 역력했다.

“큰 무녀님… 죄송합니다. 의도치 않게… 모든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명아는 고개를 숙였다. 큰 무녀님은 명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부드럽게 손을 내저었다. “사과할 필요 없다, 명아야. 때가 되면 모두가 알아야 할 이야기였으니. 네가 듣게 된 것도 어쩌면 신의 뜻이리라.”

큰 무녀님의 관대한 말에 명아는 겨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빛에는 방금 들은 끔찍한 이야기와 더불어, 무녀로서의 학구적인 탐구심이 번뜩였다.

“큰 무녀님, 아까 ‘아흔 달이 아흔 번 차고 이지러지는’ 시간이라고 하셨지요? 혹시 이것이 음력으로 90 곱하기 90, 즉 8,100개월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명아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지만, 확신에 차 있었다. 큰 무녀님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명아는 그제야 안도한 듯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복잡한 계산이 시작된 듯했다. 명아는 무언가에 홀린 듯 손가락으로 허공을 짚어가며 빠른 속도로 계산을 이어나갔다.

“8,100개월… 음력 한 달을 평균 29.53일로 보면, 대략 239,200일 정도이고요… 이걸 양력으로 환산하면 655년하고도 몇 개월이 됩니다.”

명아는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큰 무녀님께서 말씀하신 혼란의 시기가 조선이 건국된 1392년 직전의 1380년대 즈음이었다면… 그때부터 655년하고 몇 개월이 지난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몇 년 후가 아니라, 이제 거의 다 끝났을 시점입니다. 어쩌면… 어쩌면 형벌이 이미 끝나고 다시 무녀의 모습으로 돌아왔을지도 모릅니다!”

명아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떨렸다. 그녀는 주전자를 감싼 큰 무녀님의 손을 바라보았다. 루아 역시 명아의 계산에 경악하며 숨을 멈췄다. 끔찍한 형벌의 시간이, 기나긴 인고의 시간이 드디어 끝났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적인 가능성이 온몸을 감쌌다.

명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큰 무녀님이라면… 형벌에서 풀려난 서리에게… 처음으로 무슨 말을 해 주실 건가요?”

큰 무녀님은 명아와 루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작게 핀잔하듯 미소 지었다.

“이 주전자가 바로 옆에 있는데, 그걸 지금 나에게 물어보면 어찌하느냐. 어리석은 것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한없이 따뜻하고 깊었다. 큰 무녀님은 주전자를 두 팔로 소중히 끌어안았다.

“무슨 말을 하겠느냐. 그저… ’그간 그리웠다, 서리야. 너와 다시 함께 할 때를 고대했다’고 말해주고… 꼭 안아 줄 게다.”[B:8]


그날 밤, 큰 무녀님은 평소처럼 고요히 잠자리에 들었다. 무녀의 습관대로 짧고 깊은 잠이었다. 이른 아침, 아직 해가 완전히 떠오르기 전의 푸른 기운이 방 안을 감싸고 있을 때, 큰 무녀님은 눈을 떴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 옆자리의 온기가 느껴졌다. 평소에는 느껴지지 않던, 작고 소중한 체온이었다.

큰 무녀님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옅은 새벽빛 아래, 자신의 옆에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한 사람이 나란히 누워 잠들어 있었다. 단정한 이목구비, 차분히 내려앉은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평화로운 숨소리. 더 이상 차가운 도자기의 감촉이 아니었다. 주전자는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는 서리가 있었다.

명아의 계산이 맞았던 것이다. ‘아흔 달이 아흔 번 차고 이지러지는’ 그 기나긴 형벌의 시간이, 마침내 끝이 났다. 큰 무녀님의 얼굴에 회한과 그리움, 그리고 깊은 안도가 뒤섞인 미소가 번졌다. 6백 년이 넘는 세월. 고통과 속죄의 시간이 그녀를 다시 온전한 무녀의 모습으로 돌려놓았다.

큰 무녀님은 조심스럽게 팔을 뻗어 아직 잠들어 있는 서리를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따뜻한 체온과 나직한 숨소리가 그녀의 품 안에서 느껴졌다.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이제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다.

‘이제 명아가 썼다는 그 무녀 생활 가이드가 필요할 때가 되었군.’

큰 무녀님은 가만히 서리를 품에 안은 채, 다시금 눈을 감았다. 따뜻하고 평화로운 기운 속에서, 그녀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새로운 시대의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B: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