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3년, 신사에는 평소와 다른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한적하고 고요하던 신사의 경계가 알 수 없는 파동으로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무녀들은 감지했다. 이것은 일반적인 방문객의 기척이 아니었다. 시간의 무녀들이 직접 이 공간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들은 공간 이동에 제약을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까지 왔다는 것은 그만큼 다급하고 중요한 일이 발생했음을 의미했다.
루아, 이슬, 명아, 채은, 지수, 별이, 그리고 어린 샘이와 아린까지, 모든 현신의 무녀들이 신사 본당에 모였다. 큰 무녀님은 평소의 온화한 미소 대신, 웃음기 하나 없는, 심각하고도 비장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계셨다. 그녀의 눈빛은 이미 다가올 상황을 예견하고 있는 듯 깊고 아득했다.
잠시 후, 신사 문이 조용히 열리고 두 명의 시간의 무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명은 지혜로운 눈빛의 무녀인 예진, 다른 한 명은 모든 시간을 동시에 품고 있는 듯한 오묘한 눈빛의 중성적인 시간의 수호자였다. 그들의 등장은 시공간의 흐름을 왜곡시키는 듯한 기묘한 기운을 풍겼다.
시간의 무녀들은 본당 중앙에 자리 잡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평소의 초연함 대신, 깊은 우려와 긴박함이 서려 있었다. 시간의 수호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고요했지만, 그 울림은 신사 전체를 진동시키는 듯했다.
“큰 무녀님, 그리고 현신의 무녀들이여. 저희가 직접 이곳까지 온 것은… 피할 수 없는 거대한 혼란의 시기가 임박했음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루아와 다른 무녀들은 숨을 죽였다. ’큰 혼란의 시기’라는 단어는 이미 큰 무녀님과 시간의 수호자를 통해 여러 번 언급되었던 예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적인 경고는 처음이었다.
예진이 덧붙였다. “저희가 지켜본 바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약 4년 반 뒤, 즉 2038년 초에 세상의 근원적인 균형이 크게 흔들릴 징조가 보입니다. 단순히 지역적인 재앙이 아닙니다. 세상의 물질적, 시간적, 그리고 정보적 흐름이 모두 교란될 수 있는… 전례 없는 위협입니다.”
시간의 수호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녀의 눈빛이 마치 먼 미래의 재앙을 직접 보고 있는 듯 아득해졌다.
“구체적인 현상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으나, 저희의 예지는 거대한 공간의 왜곡과 시간의 혼란, 그리고 정보의 단절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이치가 무너질 수도 있는 대격변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큰 무녀님은 침묵한 채 시간의 무녀들의 이야기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평생을 살아오며 보아온 그 어떤 위기 때보다 깊은 고뇌와 결의가 스쳐 지나갔다. 현신의 무녀들 또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자신들의 존재 자체가 세상의 균형을 지키기 위함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다가올 거대한 위협 앞에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시간의 무녀들의 경고는 고요했던 신사를 뒤흔드는 거대한 파동이 되어, 다가올 운명적 싸움의 서막을 알리고 있었다.[9:1]
시간의 무녀들이 전한 ’2038년 초, 거대한 혼란의 시기’라는 경고는 신사 전체를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고요하던 본당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흐르다 이내 술렁거리는 소리로 채워졌다. 현신의 무녀들은 모두 모여 다가올 위기가 정확히 무엇인지 논의하기 시작했다. 큰 무녀님은 무녀들의 논의를 묵묵히 지켜보며 그들의 지혜가 답을 찾기를 기다렸다.
가장 먼저 의견을 제시한 것은 명아였다. 그녀는 전자 기기를 다루는 능력을 가진 만큼, 세상의 디지털 시스템에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큰 무녀님, 그리고 모든 무녀님들. 제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2038년 초에 발생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문제는 바로 ’유닉스 시간 오버플로우’입니다.”
명아는 무녀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을 이어갔다. “세상의 거의 모든 컴퓨터와 통신 시스템은 시간을 셀 때 유닉스 시간이라는 방식을 사용해요. 1970년 1월 1일 자정부터 초를 세는 방식인데, 이게 32비트 정수로 저장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이 숫자가 2038년 1월 19일 3시 14분 7초가 되면 더 이상 셀 수 없는 한계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쉽게 말해, 마치 Y2K 때처럼 컴퓨터 시계가 갑자기 과거로 돌아가거나 멈춰버리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전 세계의 금융 시스템, 교통 통제 시스템, 통신망, 전력망 같은 모든 디지털 인프라가 마비될 수 있습니다. 비행기가 추락하거나, 은행 업무가 중단되거나, 병원 시스템이 멈추는 등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대혼란이 벌어질 수 있죠. 저희의 능력으로도 이 모든 시스템을 한 번에 복구하는 건 불가능할 겁니다.”
명아의 설명이 끝나자, 이번에는 지수가 자신의 의견을 제시했다. 그녀는 오래된 지식과 자연의 흐름을 읽는 데 능숙했다.
“저 역시 명아의 의견에 깊이 공감하지만, 저는 다른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고대 문헌과 자연의 징후들을 분석한 바에 따르면, 2038년은 태양 활동이 극대에 이르는 시기와 맞물립니다. 이 시기에는 강력한 코로나 질량 방출, 즉 CME(Coronal Mass Ejection)가 발생할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지수는 말을 이었다. “태양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전자기파와 플라스마가 지구 대기와 충돌하면, 넓은 지역에서 대규모 전력망 장애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전기가 끊기는 것은 물론이고, 위성 통신, GPS, 그리고 각종 전자 기계들이 고장 나 작동을 멈출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전기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이는 유닉스 시간 문제 못지않은 재앙이 될 것입니다. 당장 물을 길어 올릴 수도, 음식을 보관할 수도 없게 되며, 세상은 순식간에 암흑과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두 가지 유력한 시나리오가 제시된 가운데, 어린 아린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그녀는 시간의 흐름을 가장 오랜 기간 지켜본 존재였다.
“저는… 두 선배님들의 말씀 모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어쩌면 이 모든 것보다 더 근원적인, 세상의 ‘이치’ 자체가 흔들리는 변화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아린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의 무녀님들이 ‘공간의 왜곡’과 ’정보의 단절’을 언급하셨어요. 유닉스 시간이나 태양풍은 분명 큰 재앙이지만, 그것들이 세상의 ’공간’ 자체를 왜곡시키거나, ’정보’라는 개념 자체를 사라지게 할 수는 없을 거예요. 마치 세상의 법칙이 일그러지는 듯한… 그런 종류의 혼란일지도 모릅니다.”
아린의 발언은 무녀들 사이에 새로운 숙고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큰 무녀님은 조용히 무녀들의 의견을 경청했다. 그녀는 이미 이 모든 시나리오와, 그 너머에 있을지도 모를 진실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했다. 다가올 위협의 그림자는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9:2]
무녀들의 열띤 논의가 끝나자, 큰 무녀님은 고요하지만 단호한 시선으로 모두를 둘러보았다. 그녀의 존재감은 모든 무녀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너희들의 논의는 모두 일리가 있구나. 특히 명아와 지수의 시나리오는 현대 세상의 흐름 속에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위협들이다.”
큰 무녀님은 아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린의 지적 또한 옳다. 만약 세상의 법칙 자체가 일그러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인과율의 근원을 흔드는 일이니 우리조차 미리 대비할 방법이 없겠지.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설령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그것은 우리가 감히 막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니 특별한 대비는 필요치 않을 것이다.”
큰 무녀님의 목소리에는 흔들림 없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허나, 명아와 지수가 제시한 두 가지 위협, 즉 유닉스 시간 오버플로우와 태양풍으로 인한 전력·기계 장애는 다르다. 이 두 가지 시나리오 모두, 인류 스스로가 이론적으로는 해결책을 가지고 있는 문제들이다.”
그녀는 무녀들 한 명 한 명을 바라보며 강조했다.
“세상의 빛이 그들의 해결책을 언젠가는 찾아낼 것이나, 문제는 시간이다. 인류의 기술과 지혜가 그 해결책을 이를테면 2040년, 혹은 그 이후에나 완성한다면 2038년의 대혼란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약 4년 반. 이 짧은 시간 안에 인류 스스로가 그 대비책을 완성하도록 막후에서 조정해야 한다.”
무녀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큰 무녀님의 지시는 직접적인 개입이 아닌, 세상의 흐름을 조용히 ’가속화’시키는 것이었다.
“우리의 역할은 세상의 균형을 지키는 것이다. 직접적인 개입으로 세상의 인과율을 거스르는 것은 우리에게도 금기된 일. 하지만, 이미 존재하는 해결책이 제때 완성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다르다. 예를 들어, Y2K38 문제의 해결책이 이미 존재하지만 기술적 적용이 늦어지고 있다면, 우리가 알게 모르게 그 진행을 촉진시킬 수 있다. 태양풍에 대비한 전력망 보강 기술이 있다면, 그 기술의 개발과 적용을 가속화시키는 방식으로 말이다.”
큰 무녀님은 루아를 비롯한 무녀들을 향해 단호하게 명령했다.
“이것이 너희에게 주어진 새로운 임무다. 명아는 세상의 정보망을 통해 인류의 어떤 기술적 해결책이 지연되고 있는지 파악하고, 그 지연의 원인을 분석해야 할 것이다. 채은은 필요한 자원이 적절한 곳에 공급되도록 세상의 물질적 흐름을 보이지 않게 조정하고, 지수는 고대의 지혜와 현대 기술을 연결할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루아, 너는 서연 기자를 통해 세상의 여론을 움직이거나 필요한 정보를 흘려 보내는 등, 외부와의 접점을 활용하여 이 모든 과정이 매끄럽게 진행되도록 이끌어야 한다.”
큰 무녀님의 설명은 무녀들에게 명확한 방향을 제시했다.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해 직접 나서는 것이 아니라, 인류 스스로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은밀하게 돕는 것. 보이지 않는 손으로 역사의 흐름을 미세하게 조정하는, 무녀들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었다.
“시간은 촉박하다. 이제부터 너희는 각자의 능력을 총동원하여 2038년의 대혼란을 막을 준비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큰 무녀님의 목소리는 신사 본당을 가득 채웠고, 모든 무녀들은 다가올 임무에 대한 결의를 다졌다.[9:3]
신사의 고요함은 이따금 들려오는 나뭇잎 스치는 소리 외에는 어떤 소리도 허락하지 않는 듯했으나, 그 안에서는 전례 없는 학구열이 불타고 있었다. 큰 무녀님의 명령이 떨어진 후 처음 6개월은, 무녀들이 직접적인 행동을 삼간 채 오직 조사와 분석에만 매달리는 시간이었다. 인류의 운명을 좌우할 ‘가속화’ 작업을 가장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누구에게 영감을 주고, 어떤 경로로 영향을 미치며,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에 대한 치밀한 전략을 세우는 데 전력을 다했다.
무녀들의 수는 결코 많지 않았다. 소수 정예의 그들은 전 인류에게 동시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었기에, 파급력이 가장 큰 핵심 인물들을 선별하고 그들의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데 집중해야 했다. 특히 Y2K38 문제에 대해서는 구형 임베디드 장치들이 가장 큰 취약점으로 지목되었다. 지수는 수십 년간 쌓인 지식의 서가 속에서 관련 자료를 쉴 새 없이 찾아냈고, 명아는 세계 곳곳의 정보망을 뒤져 구형 장치들이 어떤 식으로 교체를 거부하고 있는지, 그 안에 숨겨진 물리적, 경제적, 심리적 장벽들을 면밀히 분석했다. 결국 무녀들은 구형 장치를 교체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상황들을 은밀하게 유도하는 방향으로 전략의 가닥을 잡았다. 이는 단순한 기술적 결함 해소를 넘어, 구식 시스템에 안주하는 인류의 고질적인 관성을 흔들어야 하는 복잡한 과제였다.
한편, 태양풍(CME) 예측 기술의 가속화 전략은 더욱 기묘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새롬의 예리한 시선으로 미래의 흐름을 읽고, 예진이 과거의 기록 속에서 패턴을 찾아내는 사이, 이들은 ’실수’라는 기발한 도구를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실제 과학적 관측과는 전혀 무관하게, 인위적으로 주입된 작은 ’오류’가 동시에 여러 연구팀의 예측 모델에 반영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이는 마치 거대한 파도를 만들기 위해 작은 돌멩이 여러 개를 동시에 던지는 행위와 같았다. 의도치 않은 ’오류’로 인해 전혀 다른 접근 방식을 가진 연구팀들이 일제히 특정 CME의 발생을 예측하게 됨으로써, 인류는 경고를 무시할 수 없게 되고 예측 시스템의 빠른 검증과 발전이 강제될 터였다.
겉모습은 아직 어린아이 같지만 수백 년을 살아온 아린이 “내가 신사에 있던 시간들 중 이렇게 전 신사가 학구적이었을 때가 없었어!” 라고 감탄할 정도로, 모든 무녀들은 각자의 전문성을 총동원하여 수많은 검토와 논의를 거듭하며 가장 정교하고 파급력 있는 전략을 다듬어 나갔다.[9:4]
깊은 산속 신사에서의 학구적인 분위기는 이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인류의 운명을 좌우할 ‘가속화’ 작전의 대부분이 해외에서 진행될 것이라는 결론이 도출되자,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해외 잠입과 작전 수행, 그리고 안전한 귀환으로 좁혀졌다. 기존에 자동차 형태로 활동하며 세상의 물리적 흐름에 익숙했던 루아 외에, 몸집이 작고 연륜 있는 선배 무녀 아린이 새로운 파트너로 합류했다. 이 둘은 에너지 효율이 극대화된 소형 드론으로 변신하는 연습에 돌입했다.
신사 본관 뒤편의 비좁은 공간에는 온갖 형태의 소형 드론 부품들이 흩어져 있었다. 루아는 마치 오래된 친구를 다시 만난 듯 익숙하게 부품들을 살폈다. 특히 드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소형 배터리, 그 복잡한 내부 구조와 에너지 흐름을 다시금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이 미세한 에너지 효율의 차이가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대륙 간 이동의 성패를 좌우할 것이었다. 그녀의 손길은 정교하고 망설임이 없었다. 한편 아린은 어색한 몸짓으로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수백 년을 살아오며 수많은 모습으로 변신해왔지만, 스스로를 운송 수단으로 변형시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에게는 작은 바퀴나 날개 하나하나가 생경한 감각으로 다가왔다.
“이게 비행할 때 필요한 동력원이에요, 선배님. 충전과 방전을 효율적으로 제어하는 게 핵심이죠.” 루아는 침착하게 배터리의 회로도를 펼쳐 보이며 설명했다. “몸을 이런 형태로 바꾸면 미세한 공기 저항까지 신경 써야 해요. 동체와 날개의 각도, 그리고 추진력 조절이 중요하죠.”
아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루아의 설명을 경청했다. 루아는 드론으로 변신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며 공중에서의 자세 제어, 바람을 타는 법, 그리고 최소한의 에너지로 최대한의 거리를 비행하는 요령을 속성으로 가르쳤다. 태평양을 곧바로 가로지르는 무모한 시도 대신, 철새들이 그러하듯 인가 주변, 특히 ’맛있는 것을 얻을 수 있을 만한 거주지’들을 중심으로 이동하는 전략이 세워졌다. 이 방법은 시간이 다소 걸리더라도 에너지를 제때 보급받을 수 있어 소리 소문 없이 지구 곳곳을 드나들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현재 기술 수준을 고려했을 때, 편도 이동 시간은 일주일이 채 걸리지 않을 것으로 판단되었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두 무녀는 드론으로 변신해 윙 하는 낮은 소리를 내며 신사 주변을 비행했고, 그들의 움직임은 점점 더 유연하고 조용해졌다. 임무가 다가오고 있었다.[9:5]
신사의 지하실, 어둠이 깔린 훈련장에는 작은 그림자 둘이 맴돌았다. 하나는 매끄럽고 유선형의 은회색 소형 드론, 또 하나는 앙증맞은 로봇 장난감이었다. 드론은 루아였고, 장난감은 작전 투입을 위해 특별히 준비된 샘이였다. 샘이의 등 뒤에는 미세하게 빛나는 USB 포트가 달려 있었다. 이것이 첫 드론 임무이자, 태양풍(CME) 예측 가속화 전략의 첫 단추를 꿰는 시험 비행이었다.
루아는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의 한 연구실까지 샘이를 데려다 놓는 임무를 맡았다.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것은 아직 무녀의 몸으로도 무리한 여정이었기에, 그들은 미리 정해둔 철새의 이동 경로를 따라 섬과 육지를 징검다리 삼아 날아갔다. 수면 위를 스치듯 낮게 날 때는 파도 소리가 속삭였고, 고요한 밤하늘을 가를 때는 별빛이 길을 안내했다. 때로는 인적 드문 어촌의 창고 처마 밑에 숨어 에너지를 보충했고, 한적한 도시의 공원 나무 위에서 잠시 몸을 뉜 채 다음 비행을 준비하기도 했다. 비록 일주일 가까운 긴 여정이었지만, 아무도 모르게 지구 반대편으로 스며들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덴버 상공에 다다른 것은 이른 새벽, 도시가 채 깨어나기 전이었다. 루아는 고층 빌딩의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긴 채 목표 연구실 건물을 주시했다. 정교한 센서로 건물의 내부 구조, 보안 시스템, 그리고 주요 인물의 이동 경로까지 스캔했다. 루아는 건물 뒤편의 자그마한 환기구를 통해 잠입한 뒤, 연구실 내부의 은밀한 공간에 샘이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건물 외벽의 좁은 틈새에 완벽하게 몸을 숨긴 채,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기를 숨죽여 기다렸다. 심장이 드론 모터처럼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지만, 그녀는 임무에만 집중했다.
샘이는 루아가 사라지자마자, 작은 바퀴를 굴려 목표 컴퓨터가 있는 책상 아래로 조용히 움직였다. 녀석의 로봇 눈은 흐릿한 모니터 불빛을 따라 움직였다. 명아의 지시에 따라 정확한 위치를 찾아낸 샘이는 능숙하게 몸을 세워 USB 포트를 찾아냈다. 찰나의 순간, 작은 기계음과 함께 USB가 컴퓨터에 연결되었다. 이제 샘이의 몸을 통해 명아의 지시가 전송될 차례였다. 샘이는 작은 로봇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뛰어난 텔레파시 능력으로 데이터를 조작할 수 있는 무녀의 영혼이 깃들어 있었다.
명아는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신사에서, 전용 단말기를 통해 샘이가 보는 화면을 실시간으로 공유받고 있었다. 목표는 특정 CME 예측 모델의 입력값을 미세하게 조작하여, 실제 발생 가능성과 무관하게 여러 연구팀이 동시에 동일한 예측을 내놓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루아와 샘이도 명아의 가르침으로 기본적인 데이터 조작 방식은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민감한 과학 데이터의 정교한 수정은 명아의 전문 영역이었다.
명아의 눈은 화면 속 데이터를 훑어 내려갔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파일 포맷이 일반적인 텍스트나 바이너리 형식이 아닌, 구닥다리 마이크로소프트 엑셀 스프레드시트였던 것이다. “이런… 이 정도로 낡은 포맷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니.” 명아의 입에서 낮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옛 엑셀 파일은 구조가 복잡하여 단순한 값 변경만으로는 의도한 결과를 얻기 어려울 수 있었다. 서식이나 매크로, 숨겨진 셀 등으로 인해 자칫 잘못 건드리면 파일 전체가 손상되거나 수정 흔적이 남을 위험이 있었다. 순간, 명아의 얼굴에 깊은 고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시간은 촉박했고, 실패는 곧 작전의 무산을 의미했다.
명아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녀의 정신은 신사의 가장 깊은 곳, 빛의 무녀의 영역으로 향했다. “빛의 무녀이시여…” 그녀는 간절히 기도했다. “이 작은 무녀가 어둠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샘이의 손을 빌려 데이터의 흐름을 잠시만 제어할 수 있도록, 지혜의 빛을 내려주십시오. 인류를 구할 이 첫걸음이 좌절되지 않도록, 힘을 더해주십시오.”
기도가 끝남과 동시에 명아의 의식 속에서 강력한 빛줄기가 뻗어나와 샘이가 있는 곳까지 연결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정보의 공유를 넘어, 직접적인 제어 권한을 부여받았다는 명확한 신호였다. 마치 자신의 손과 발처럼 샘이의 작은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명아는 즉시 정신을 집중하여 샘이의 시야를 통해 엑셀 파일을 들여다보았다. 복잡한 셀 구조와 함수들이 눈앞에 명확하게 펼쳐졌다.
명아는 오랜 시간 축적된 지식과 통찰력을 발휘하여 데이터의 핵심을 파고들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조작을 통해 특정 셀의 수치를 조정하고, 관련 함수에 아주 작은 오차값을 삽입했다. 이 변화는 육안으로는 전혀 구별할 수 없었지만, 연구실의 시뮬레이션 모델에 들어가면 미묘한 오작동을 일으켜 특정 시기의 CME 발생 확률을 왜곡시키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었다. 그녀의 손길은 빠르고 정확했다.
모든 조작이 끝나자, 명아는 조용히 USB 연결을 해제했다. 샘이는 처음의 위치로 되돌아가 조용히 몸을 숨겼다. 명아는 신사에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임무는 성공적이었다. 첫 파일럿 작전은 예상치 못한 변수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마무리되었다. 그녀는 샘이에게 돌아오라는 지시를 내렸고, 루아는 이제 샘이와 함께 조용히 덴버를 벗어나 귀환 길에 오를 준비를 했다. 세상의 균형을 위한 보이지 않는 움직임이 막 시작된 순간이었다.[9:6]
몇 차례의 작전은 놀랍도록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루아와 명아의 첫 파일럿 임무는 성공의 청사진을 제시했고, 이어지는 임무들 또한 물 흐르듯 계획대로 이루어졌다. 어린아이 같은 외모와 달리 신사에서 가장 오랜 세월을 보낸 아린 역시 드론 변신에 완벽하게 적응하며 첫 처녀 비행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녀의 작고 민첩한 드론 몸체는 가장 은밀한 침투에 최적화되어 있었고, 계획은 이제 막 물이 오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린은 샘이와 별이를 드론 몸체에 태우고 호주 시드니로 향하는 임무를 맡았다. 목적지는 태양풍 관련 연구소였다. 드넓은 태평양을 건너는 긴 여정, 마침 그때는 철새들의 대이동 시기였다. 밤하늘을 수놓은 별빛 아래, 수천 수만 마리의 철새들이 목적지를 향해 날갯짓하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무녀의 뛰어난 감각으로 새떼를 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엄청난 규모의 새떼는 아린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갑작스러운 충돌이었다. 거대한 새떼가 드론의 비행 경로를 덮치듯 지나갔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아린의 드론 몸체가 크게 흔들렸다. 간신히 균형을 되찾았지만, 그녀의 신경은 즉시 등 뒤로 향했다. 작은 충격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변신한 별이와 샘이가 무사한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샘이에게서는 괜찮다는 텔레파시가 왔으나, 별이에게서는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별이야!” 아린의 텔레파시가 허공을 갈랐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추락? 충돌의 여파로 별이가 떨어져 나간 것인가? 아린은 즉시 고도를 낮추고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별이가 작전 투입을 위해 극도로 작게 변신해 있었다는 점이었다. 더군다나 상당한 높이에서 떨어졌으니, 그 낙하 지점은 수십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광활한 범위 안에 있을 터였다. 호주 노던 준주의 인적 드문 사막 한복판, 현지 시각으로 한밤중이었다.
아린은 필사적으로 별이를 찾아 나섰다. 어둠 속에서 작은 물체를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다행히 별이에게서 희미하게나마 텔레파시가 통하는 것을 확인했다. 별이는 무사히 착지한 듯했지만, 주변에 특징적인 지형지물이 없어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기 어렵다고 알렸다.
“아린 언니, 저 여기 어딘가에 떨어졌어요! 아무것도 안 보여요. 사방이 똑같은 모래뿐이에요…” 별이의 목소리에는 당황스러움이 역력했다.
아린은 별이의 텔레파시를 수신하면서, 해상 수색에서 사용하는 정밀한 탐색 패턴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넓은 바다에서 표류자를 찾듯, 나선형이나 격자형으로 비행하며 별이의 시야에 자신이 들어올 수 있도록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별이의 목소리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아직 안 보여요, 언니! 정말 아무것도 없어요!”
사방이 어둠과 모래뿐인 막막한 상황 속에서, 별이는 당황스러움에 휩싸였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침착함을 되찾았다. 주변에 기댈 곳이 없다면, 오직 하늘만이 유일한 이정표였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쏟아질 듯한 별들이 마치 거대한 지도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별이는 그간 갈고 닦은 관측 능력을 발휘했다. 그녀는 북반구와 남반구에서 다르게 보이는 별자리들을 숙지하고 있었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별들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 능숙했다. 북두칠성, 카시오페이아, 남십자성… 익숙한 별자리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별이는 별들의 배치와 고도를 통해 현재 자신의 위도를 어림짐작하기 시작했다. 완벽한 정확성은 아니었지만, 수십 제곱킬로미터에 달했던 수색 영역을 몇 제곱킬로미터 이내로 크게 좁히는 데는 충분한 정보였다.
“아린 언니! 저… 대략 남위 24도 7분 근처에 있는 것 같아요! 특정 별자리가 이 각도에 보여요!” 별이의 목소리에 확신이 실렸다.
아린은 별이가 보내온 정보를 토대로 즉시 비행 경로를 수정했다. 광활한 사막 한복판에서 대충의 경도 정보를 얻어내는 것은 상상 이상의 성과였다. 그녀는 이제 훨씬 좁아진 영역을 집중적으로 탐색했고, 몇 분 지나지 않아 별이의 작은 몸체가 모래 위에 희미하게 보이는 것을 감지했다.
“별이야! 찾았다!” 아린의 텔레파시가 기쁨으로 울렸다.
별이는 아린의 드론이 자신을 향해 내려오는 것을 보자마자 안도감과 동시에 강한 결심을 했다.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 거야! 아린의 드론 몸체가 땅에 닿자마자, 별이는 망설임 없이 바싹 달라붙었다. 작은 장난감 몸으로 꼭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 애쓰는 별이의 모습은 어린아이처럼 귀여웠다.
아린은 별이의 반응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보통은 내가 가장 어려 보이니까 언니들한테 보호받는 입장인데, 나한테도 이런 일이 있구나.’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수백 년의 세월 동안 늘 ’어린 막내’처럼 여겨졌던 아린에게, 누군가를 보호하고 책임져야 하는 이런 상황은 낯설면서도 묘한 뿌듯함을 안겨주었다. 아린은 별이가 떨어지지 않도록 몸체를 단단히 고정하고, 다시금 시드니를 향해 밤하늘로 솟아올랐다. 이번에는 훨씬 더 조심스럽게, 그리고 조금 더 든든하게.[9:7]
연구 결과를 조작해 인류의 시야를 강제적으로 미래로 향하게 하는 한편, 신사에서는 또 다른 전략이 은밀하게 실행되고 있었다. 이는 바로 구형 임베디드 기기들을 ‘자진해서’ 교체하게 만드는 작전이었다. 지수와 지혜가 방대한 자료를 검토하고 예진이 과거 사례를 분석한 끝에, 업그레이드하지 않으면 대혼란을 초래할 위험이 있는 기기들을 중요도 순으로 분류했다. 이 기기들은 단순히 고장 내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 스스로 불편함을 느껴 교체를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 핵심이었다.
작전의 방법은 다양하고 기상천외했다. 가장 기본적인 방식은 현신의 무녀들이 직접 현장에 접근하는 것이었다. 상대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기기들의 경우, 해당 지역에 익숙한 현신의 무녀가 직접 변신하여 조용히 접근했다. 예를 들어, 주홍은 작은 빛의 입자로 변신하여 오래된 공장 제어 시스템의 디스플레이에 침투했다. 그녀는 화면의 색상 팔레트를 미세하게 왜곡시키거나, 특정 픽셀이 미묘하게 어긋나 보이도록 조작했다. 육안으로는 완벽한 고장으로 보이지 않지만, 화면의 글자들이 비틀리거나 이미지의 색감이 미묘하게 불쾌한 조합으로 변하는 식이었다. 동작 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지만, 작업자의 눈을 피로하게 하고 뇌에 알 수 없는 불쾌감을 조성하여 결국 교체 건의가 올라오도록 유도하는 방식이었다. 이들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처럼 기기 속을 파고들어 인류의 무심한 일상에 작은 불쾌함을 심어 넣었다.
대륙을 넘나드는 장거리 작전에는 루아와 아린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루아는 때로는 고속으로 달리는 승용차의 내비게이션 시스템에 오류를 심어 길을 헤매게 만들었고, 때로는 오래된 공항의 수하물 분류 시스템 제어판에 알 수 없는 노이즈를 발생시켜 운영 효율을 떨어뜨렸다. 아린은 훨씬 더 작은 드론 형태로 변신하여 접근하기 어려운 밀폐된 공간이나 고층 건물의 전광판 제어 장치에 침투했다. 그들은 시스템의 핵심 기능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사용자가 ’이제는 정말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하도록 유도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한밤중 갑자기 폰트가 깨지거나 의미 없는 문자가 번쩍이는 오래된 ATM 기기, 영문도 모르게 화면이 뒤집히는 산업용 모니터 등이 이들의 흔적이었다.
어떤 경우에는 직접적인 물리적 접촉 대신, 서류 조작이라는 고도의 심리전이 동원되기도 했다. 율과 솔은 인류의 복잡한 행정 시스템 속으로 스며들어, 마치 컴퓨터 시스템의 사소한 오류처럼 보이도록 특정 기기의 교체 시기를 앞당기는 내용의 문서를 은밀히 생성하거나 기존 문서를 조작했다. 이는 기업 내부의 정기 점검 계획이나 정부 조달 사업의 품목 목록 등, 언뜻 보아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 문서들 속에 숨겨졌다. 그렇게 조작된 서류들은 의도치 않은 ’행정상의 실수’처럼 인식되어, 관련 기기들이 예상보다 빨리 교체 주기에 오르도록 만들었다.
가장 충격적이면서도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는 아린이 고안한 방식이었다. 그녀는 작은 새로 변신하여 바깥에 노출되어 있는 구형 기기들, 이를테면 도시 곳곳에 설치된 오래된 교통 신호등 제어함이나 폐쇄회로(CCTV) 카메라 렌즈 위에 의도적으로 배설물을 흩뿌리는 작전을 펼쳤다. 조류의 배설물은 부식성이 강하여 전자 장비에 치명적일 수 있었다. 물론 무녀의 배설물은 인체에 무해했으나, 그것이 기기에 미치는 영향은 일반적인 조류의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사용자들은 렌즈에 들러붙은 오물로 인해 화면이 흐려지거나, 제어함 내부의 미세한 부식으로 오작동이 발생하는 것을 보고는 더 이상 수리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새것으로 교체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다양하고 때로는 기묘하기까지 한 방법들이 동원되어, 인류는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스스로 구형 시스템을 낡은 과거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9:8]
산속 신사의 무녀들만이 인류의 위기를 감지하고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외부 세계에는 루아의 비밀을 공유하는 한 명의 인간 조력자가 있었으니, 바로 탁월한 언론인이자 탐사 보도 전문팀을 이끄는 서연이었다. 그녀는 신사에서 벌어지는 모든 미세한 움직임을 알지는 못했지만, 루아가 종종 자동차로, 이제는 작은 드론으로 변신하여 세계 각지를 누비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인지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녀들이 씨앗을 뿌리면, 서연은 그 씨앗이 싹을 울 수 있도록 세상을 갈고닦는 역할을 했다.
다국적 연구팀들의 관측이 태양풍(CME)이 2037년에서 2038년경에 예상된다는 데 수렴하면서 하루속히 대비해야 한다는 결의가 언론을 통해 대서특필된 데는 서연의 공이 컸다. 명아와 샘이, 아린과 별이가 조작한 미세한 데이터의 파동이 학계에 일렁임을 시작하자, 서연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녀는 전 세계의 다양한 언론인들을 직접 만나, 복잡한 과학적 정보를 일반인들도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가공하고 확산시키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전문가들의 경고가 단순한 소문으로 묻히지 않고, 긴급한 의제로 대중에게 각인되도록 만드는 것은 그녀의 탁월한 스토리텔링 능력과 언론 장악력 덕분이었다. 위기의식이 인류의 심장부까지 파고들자, 관련 기업과 정부 기관들은 마지못해 대응책 마련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Y2K38 문제에 대한 집중 보도 또한 서연을 포함한 그녀의 탐사 보도팀의 결실이었다. 지수와 솔 등의 무녀들이 오래된 임베디드 기기들을 교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유도하는 한편, 서연의 팀은 잠재된 위험성을 파헤쳐 대중에게 알렸다. 오래된 시스템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개인의 일상생활부터 국가 기반 시설까지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한 심층 보도가 연일 이어졌다. 불편함 때문에 자발적인 교체를 고민하던 사람들은 언론의 보도를 통해 비로소 그 문제가 시급하고 중대한 것임을 깨달았다. 이는 단순한 취재를 넘어, 인류가 스스로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책을 찾도록 유도하는 거대한 움직임의 일부였다.
어느 날, 서연은 남미로 해외 출장을 나갔다. 아마존 생태계 파괴에 대한 심층 보도를 위해 며칠째 오지를 헤매던 참이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작은 오두막에 도착해 잠시 숨을 고르던 그때였다. 그녀의 눈앞에 아주 작고 매끄러운 은회색 드론 한 대가 윙- 하는 낮은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루아가 서연을 발견한 것이었다. 루아의 드론 몸체는 작은 발처럼 생긴 착륙 장치로 바닥을 짚더니, 놀랍게도 땅 위에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흙바닥에 나뭇가지로 한 글자 한 글자 쓰여진 것은 다름 아닌 ‘잘 지내?’ 라는 지극히 평범한 한글 문구였다. 그것을 본 서연은 순간 자신이 꿈을 꾸고 있나 착각했다. 사방이 흙과 나무뿐인 남미 오지에서, 먼 길을 날아온 소형 드론이 한글로 인사를 건네다니! 임무를 마친 후의 여유로움과 오랜만에 만난 동료에 대한 반가움이었을까. 하지만 그 상황의 비현실적인 유머러스함에 서연은 한동안 굳어진 채 어이가 사라진 표정으로 드론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입에서는 헛웃음만이 터져 나왔다. 세상의 균형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자신과 루아의 삶은 이처럼 비범하면서도 때로는 황당한 순간들로 채워져 있었다.[9:9]
2038년 1월 19일 밤, 신사의 대청마루에는 묘한 긴장감과 기대감이 흘렀다. 큰 무녀님을 비롯해 모든 무녀들이 한자리에 모여, 중앙에 놓인 명아의 앞에 앉아 있었다. 명아는 이제 매끄럽고 거대한 평면 텔레비전으로 변신해, 인류의 2038년 대혼란을 결정할 중요한 특집 방송을 송출하고 있었다. 현신의 무녀들인 지수, 아린, 그리고 루아, 샘이, 별이부터 시간의 무녀들인 새롬, 예진, 솔, 지혜, 율까지, 모두가 숨죽인 채 화면을 응시했다. 이 순간은 지난 4년간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쏟아낸 모든 노력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자정 무렵, 화면 속 아나운서는 긴장된 목소리로 유닉스 시간의 카운트다운이 마침내 임계점을 넘었음을 알렸다. 심장이 조여드는 듯한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전 세계 곳곳에서 들어오는 뉴스 속보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오래된 시스템이 사소한 오류를 일으켜 전광판에 잘못된 시간이 표시되거나, 은행 ATM이 몇 분간 정지하는 등의 문제가 보고되었다. 하지만 우려했던 전력망 붕괴나 교통 시스템 마비, 금융 시스템 오류와 같은 치명적인 대재앙은 그 어디에서도 발생하지 않았다.
“성공이다….” 작은 속삭임이 처음으로 터져 나왔고, 이내 대청마루를 가득 채웠다. 무녀들 모두가 일제히 가슴을 쓸어내리며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4년, 명아와 샘이가 밤샘하며 조작했던 수많은 데이터들, 지수가 파헤쳤던 구형 시스템의 취약점들, 아린과 루아가 전 세계를 누비며 감행했던 은밀한 침투들, 솔과 지혜가 바꿔놓았던 행정 서류들, 그리고 서연의 손을 거쳐 대중에게 확산되었던 경고의 목소리까지… 모든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고생 많았어요, 모두.” 새롬이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지혜가 지수의 손을 맞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린은 활짝 웃으며 루아의 어깨를 토닥였다. 서로의 얼굴에는 피로와 함께 형언할 수 없는 보람과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직접 세상에 나서는 대신, 인류 스스로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뒤에서 조용히 밀어주는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그때, 명아의 텔레비전 화면이 잠시 지직거리더니 새로운 뉴스 속보를 띄웠다. 그것은 태양풍(CME) 관련 소식이었다. 사실 같은 날 새벽, 거대한 CME가 실제로 발생하여 지구 방향으로 맹렬하게 다가왔다는 내용이었다. 무녀들은 순간 숨을 멈췄다. Y2K38 문제 해결에만 집중하느라 CME의 최종 진행 상황은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터였다. 그러나 이어진 아나운서의 담담한 목소리는 그들을 다시 안도하게 했다. “수십 년 만에 관측된 강력한 태양풍이었으나, 다행히 지구 자기장을 아슬아슬하게 빗겨 나가면서 별다른 피해를 발생시키지 않았습니다. 전 세계 연구팀의 조기 예측과 발 빠른 대응 덕분에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는 분석입니다.”
명아의 표정에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분명 자신과 샘이의 조작이 그 조기 예측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발생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인류가 준비되어 있었기에 피해를 면한 것이었다. 대청마루에 모인 무녀들의 얼굴에는 깊은 보람이 피어났다. 세상은 자신들의 직접적인 존재를 알지 못하겠지만, 인류가 스스로의 힘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은 충분했다.
큰 무녀님은 고요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깊은 눈빛 속에는 무녀들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긍지가 담겨 있었다. “너희들은 인류에게 필요한 ’시간’을 벌어주었고, 그들이 스스로의 지혜를 발휘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이것이 바로 신사의 역할이자, 너희들의 진정한 힘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신사 전체를 감싸는 듯 따뜻했다. 무녀들은 서로를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밤은 깊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세상의 평화를 지켰다는 빛나는 보람이 오래도록 머물러 있었다.[9:10]
대혼란을 막아낸 성공적인 임무가 끝나고, 신사에는 다시 평화로운 정적이 찾아들었다. 그러나 그 정적 속에는 지난 4년 반의 노고가 남긴 깊은 피로가 스며들어 있었다. 모두가 몸과 마음의 휴식을 갈구할 때였다.
그때, 조용히 뒤에서 지원 역할을 도맡았던 지아가 무녀들 앞에 나섰다. “무녀님들, 다들 고생 많으셨죠? 제가 작은 선물을 준비했어요.” 그녀의 얼굴에는 미안함과 함께 작은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지난 4년간 지아 역시 자신이 변신하던 보일러 형태 그대로 신사의 난방과 온수 공급을 책임지며 묵묵히 제 몫을 다했다. 하지만 전 세계를 누비며 위험을 감수했던 다른 무녀들에 비하면 자신은 너무나 안전하고 편안한 곳에 있었다는 미안함이 늘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번 기회에 직접 모두를 위한 위로를 건네기로 결심했다.
지아는 신사 뒤편의 작은 계곡으로 무녀들을 안내했다. 졸졸 흐르던 차가운 계곡물은 신비롭게도 김을 모락모락 피어 올리고 있었다. 계곡 한쪽에는 바위를 깎아 만든 듯한 아담한 노천탕이 자리하고 있었다. 탕 주변으로는 은은한 등이 걸려 있었고, 맑은 물 위에는 꽃잎들이 흩뿌려져 있었다. 지아는 이미 자신을 거대한 보일러 형태로 변형시켜 계곡물 깊숙이 잠겨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열기가 차가운 계곡물을 따뜻한 온천수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고마워, 지아! 정말 고맙다!” 루아가 감탄하며 외쳤다. 아린은 눈을 반짝이며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명아와 지수는 피로에 지친 어깨를 서로 기대며 따뜻한 김을 들이마셨다. 새롬과 예진, 솔, 지혜, 율도 망설임 없이 물속으로 몸을 담갔다. 따뜻한 물이 온몸을 감싸자, 4년 반 동안 쌓였던 모든 긴장과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아, 좋다… 정말 천국이 따로 없네.” 별이가 나른하게 몸을 펴며 중얼거렸다. 샘이는 물속에서 작은 물장구를 치며 즐거워했다.
따뜻한 물속에서 무녀들은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았다. 아슬아슬했던 루아의 첫 임무, 아린과 별이의 예측 불가능했던 사막 조난, 그리고 수많은 밤을 새워가며 데이터를 조작하고 시스템을 교란했던 찰나의 순간들. 그 모든 힘들었던 순간들이 따뜻한 물속에서 부유하는 꽃잎처럼 아름다운 추억으로 변하는 듯했다. 지아의 따뜻한 마음이 전해져서일까, 그들은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정화되는 것을 느꼈다.
“이게 다 지아 덕분이야. 우리도 몰랐던 걸 이렇게 해내다니!” 지수가 웃으며 물속에 잠긴 지아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지아의 온몸에서 퍼져 나오는 따뜻한 온기는 그들의 노고에 대한 깊은 위로이자, 앞으로 다가올 알 수 없는 미래를 위한 새로운 힘이 되었다. 4년 반의 기나긴 여정은 그렇게, 따뜻한 온천욕 속에서 평화롭게 마무리되었다.[9:11]
따뜻한 노천탕에서의 휴식은 지난 4년 반의 여정을 씻어내고, 무녀들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제 신사에는 다시 소소한 일상이 찾아왔다. 시간의 무녀들은 본연의 역할이 있는 자신들의 신사로 돌아갔고, 현신의 무녀들은 다시금 익숙한 모습으로 신사 곳곳에 스며들었다. 거대한 임무의 성공이라는 잔잔한 보람은 그들의 일상에 여전히 스며들어 있었지만, 더 이상 긴장의 무게는 없었다.
지아는 다시 부드럽게 김을 내뿜는 보일러로 변신하여 신사 건물들에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었다. 그녀의 몸을 통해 데워진 물은 부엌으로, 목욕탕으로, 그리고 차를 끓이는 다기로 흘러 들어갔다. 그 온기 속에서 무녀들은 소박한 식사를 나누고,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지아는 더 이상 미안해하지 않았다. 그녀가 제공하는 따뜻함은 무녀들의 일상을 지탱하는 가장 근본적인 형태의 지원이었음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수는 여전히 신사의 서고 깊은 곳에 자리한 거대한 서가로 변신해 있었다. 그녀의 나뭇결 무늬 몸체 속에는 수천 년간 축적된 인류의 지식과 역사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다. 가끔은 호기심 어린 샘이가 책꽂이에 걸터앉아 고서들을 읽었고, 지수는 그런 샘이의 질문에 조용히 답해주며 지식을 전수했다. 복잡한 문제를 해결했던 지난날의 기록들도 그녀의 몸속 어딘가에 조용히 저장되어 있었다.
명아는 이제 더 이상 복잡한 정보를 분석하기 위해 텔레비전으로 변신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때로는 조용한 신사의 연못가에 자리한 작은 돌멩이로 변해 고요히 물결을 바라보기도 했고, 때로는 햇살 잘 드는 마루 위에서 따스한 햇볕을 쬐는 고양이 조각상으로 변해 늘어져 있기도 했다. 그녀의 내면에는 여전히 세상을 향한 예민한 감각이 살아있었지만, 이제는 그 감각을 긴장을 위한 것이 아닌, 평화로운 일상을 만끽하는 데 사용하고 있었다.
주홍은 신사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데 몰두했다. 그녀는 때로는 햇살을 받는 작은 보석으로 변신하여 마루의 결을 더욱 윤기 있게 만들었고, 때로는 섬세한 장식품이 되어 바람에 흔들리는 종소리처럼 공간에 은은한 기품을 더했다. 그녀의 손길이 닿은 곳마다 신사는 더욱 완벽한 아름다움을 찾아갔다.
루아는 가끔씩 신사 경계를 벗어나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기 위해 작은 자동차로 변신하곤 했지만, 이제 그 목적은 임무 수행이 아닌 단순한 ’산책’에 가까웠다. 아린과 별이는 작은 장난감으로 변신한 채 신사 주변을 뛰어놀았다. 때로는 숲속을 탐험하고, 때로는 샘이와 함께 계곡물에 발을 담그며 장난을 치기도 했다. 그들의 작은 몸에는 더 이상 긴장감이 아닌 천진난만한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아린은 자신이 가장 어리게 보이던 때처럼 걱정 없이 뛰어노는 별이와 샘이를 보며, 비로소 진정한 휴식을 얻은 듯했다.
시간의 무녀들이 돌아간 빈자리에는 미묘한 허전함이 있었지만, 현신의 무녀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평온을 찾았다. 각자 익숙한 형태로 돌아가 신사의 일부분이 되거나, 작은 존재로 변신해 자유를 만끽했다. 대혼란의 위협은 사라졌고, 그들은 자신들의 노력이 가져온 평화를 온몸으로 느끼며 고요한 신사의 품에서 다음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9:12]
시간의 무녀들에게 지난 4년은 끊임없는 관측과 계산, 그리고 내면의 긴장으로 점철된 세월이었다. 현신의 무녀들처럼 몸을 변형시켜 세상 밖으로 나가 직접적인 작전을 수행하는 것은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일이었다. 그들의 능력은 ‘시간’ 그 자체에 있었고, 이는 곧 물질적 움직임의 제한을 의미했다. 신사의 깊숙한 영역에서,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능력에 의지하여 인류의 미래를 지켜보았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인류에게 다가올 미래의 가능성들을 관측하고, 현신의 무녀들이 취할 ’특정 선택’이 얼마나 확률적으로 긍정적인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는지 알려주는 것이 전부였다. 새롬은 가장 어린 무녀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먼 미래를 꿰뚫어 보았고, 예진은 과거의 모든 기록과 패턴을 분석하여 현재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예측하는 데 능했다. 솔은 현재 시점의 미세한 변화가 미래의 거대한 흐름에 어떤 파동을 일으킬지 섬세하게 계산했으며, 지혜는 이 모든 정보들을 종합하여 가장 최적의 확률 경로를 제시했다. 그리고 율은 그 모든 가능성 속에서 인류에게 가장 유리한 ’시간’의 흐름을 조율했다. 현신의 무녀들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세상을 움직였다면, 시간의 무녀들은 그 움직임이 나아갈 가장 안전하고 효과적인 길을 제시하는 ’눈’이자 ’나침반’의 역할을 한 셈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능력은 ’모든 가능한 미래’를 보는 것이었지, ’단 하나의 확정된 미래’를 보는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변수와 인류의 자유 의지가 얽혀 만들어지는 무한한 가능성 속에서, 재앙을 피할 확률은 99%에 육박해도 남은 1%의 불확실성은 언제나 그들을 짓눌렀다. 2038년 1월 19일 밤, 명아가 변신한 텔레비전 앞에 현신의 무녀들과 함께 앉아있을 때에도 시간의 무녀들은 누구보다 더 심장이 조여드는 듯한 긴장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은 모든 긍정적인 가능성을 보아왔지만, 동시에 재앙이 닥쳐오는 끔찍한 가능성들 또한 보아왔기 때문이었다.
유닉스 시간이 임계점을 넘고, 태양풍이 지구를 아슬아슬하게 비껴 나갔다는 소식이 확인되었을 때, 비로소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짐이 사라졌다. 그제야 새롬의 얼굴에는 순수한 미소가 피어났고, 예진은 깊은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은 그동안 팽팽했던 긴장을 풀었고, 지혜와 율의 눈빛에서는 모든 가능성 중 최악의 시나리오가 마침내 배제되었다는 안도감이 역력했다. 인류의 미래를 위협했던 모든 불확실성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시간의 무녀들은 신사 깊은 곳에 자리한 자신들의 영역으로 돌아가 소소한 일상 속으로 고요히 스며들 수 있었다. 그들에게는 비로소 진정한 평화가 찾아온 것이었다.[9:13]
신사에는 다시금 평화로운 시간이 흘렀다. 큰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큰 무녀님은 오랜만에 찾아온 여유 속에서 그간 손에 잡지 못했던 소년 만화책, 《불꽃 검객 카엔》의 마지막 권을 마침내 펼쳤다. 장대한 서사의 마지막 페이지가 넘어가자, 큰 무녀님의 얼굴에는 깊은 만족감과 함께 아쉬움이 스쳤다. 수백 년의 세월을 살아온 그녀에게도 소년 만화의 뜨거운 열정과 단순명쾌한 서사는 때로는 복잡한 세상의 균형보다 더 흥미로웠다.
그때, 큰 무녀님의 옆 탁자 위에 놓인 작은 찻잔 속에서 미세한 물결이 일렁였다. 찻물 속에 비치는 그림자는 너무나 작아 보일 듯 말 듯 했으나, 그것은 다름 아닌 찻잔 속의 작은 수면 위로 몸을 변형시킨 루아였다. 루아는 큰 무녀님이 《불꽃 검객 카엔》을 얼마나 아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큰 무녀님이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조심스럽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큰 무녀님, 드디어 《불꽃 검객 카엔》을 다 읽으셨군요.”
큰 무녀님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루아. 그간 세상의 일에 파묻혀 미처 끝을 보지 못했는데, 이제야 속이 시원하구나. 카엔의 마지막 불꽃은 언제나 장엄하구나.” 그녀의 목소리에는 작품에 대한 애정이 묻어났다.
“새로운 작품을 찾고 계실 것 같아, 제가 하나 추천해 드릴까 합니다.” 루아의 텔레파시에는 자신감이 묻어 있었다. 그녀는 세상의 모든 정보를 수집하는 데 능했고, 인류의 문화 콘텐츠에도 탁월한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오호, 네가? 어떤 것이냐?” 큰 무녀님의 눈빛에 흥미가 떠올랐다.
“최근에 인기를 끌고 있는 만화인데, 《천공의 방랑자 에테르》라는 작품입니다. 검술에 대한 열정과 성장은 《불꽃 검객 카엔》 못지않고, 동료들과의 유대, 그리고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모험적인 요소가 아주 뛰어납니다. 그림체도 수려하고, 무엇보다 아직 완결되지 않아 앞으로의 이야기가 더욱 기대되는 작품입니다.”
루아의 설명에 큰 무녀님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라… 또다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야겠군. 하지만 네가 그 정도까지 추천할 정도면 분명 재미있겠지.” 큰 무녀님은 손을 뻗어 탁자 위의 마른 나뭇잎 하나를 가만히 만졌다. 그 나뭇잎은 루아가 잠시 변신해 있던 찻잔 속의 물에서 나온 것처럼 보였다. “좋다, 루아. 네 말대로 그 《천공의 방랑자 에테르》를 찾아 읽어봐야겠구나.”
루아는 큰 무녀님의 승낙에 만족한 듯, 찻잔 속에서 작은 물방울을 일으키며 기쁨을 표현했다. 거대한 위기에서 인류를 구해낸 무녀들이지만, 그들의 일상 속에는 이처럼 소소한 즐거움과 배려가 언제나 함께하고 있었다.[9:14]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