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속 무녀들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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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영겁의 독

그날은 유난히 날씨가 좋아 장 보기에 더할 나위 없는 날이었다. 루아와 이슬은 오랜만에 시장 구경도 할 겸 직접 나서기로 했다. 원래는 짝수 무녀가 조를 이뤄 움직이는 것이 일반적인 불문율이었다. 한 무녀가 의복이나 물건으로 변신하면 다른 무녀가 그것을 착용하거나 들고 다니는 식이었다. 장바구니도 필요 없이 가게에서 나오는 비닐봉투면 충분했고, 돈은 루아나 이슬의 주머니 속에서 필요한 만큼만 꺼내 쓰곤 했기에 추가적인 인원이 변신해 동행할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날은 주홍이 함께 가고 싶다며 나섰다. “제가 지갑으로 변신하면 더 편리하지 않겠어요? 짐도 안 되고, 딱 필요한 순간에 돈을 꺼내드릴 수 있잖아요!” 그녀의 말에 루아와 이슬은 잠시 서로를 바라봤다. 딱히 필요 없는 건 맞았지만, 주홍의 눈에 어린 기대감을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결국 루아가 “그럼 딱 필요한 만큼의 돈만 넣어 갈게. 너무 무거우면 곤란하니까.”라고 말하며 승낙했고, 주홍은 화사한 붉은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작고 세련된 반지갑으로 변신해 이슬의 가방 안쪽에 자리 잡았다.

시장은 활기가 넘쳤다. 온갖 먹거리와 생활용품들이 좌판 위에서 빛났고,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목소리와 흥정 소리가 뒤섞여 활기찬 에너지를 뿜어냈다. 루아와 이슬은 여유롭게 상점들을 구경하며 필요한 것들을 골랐다. 주홍은 이슬의 가방 속에서 바깥 세상의 소란스러운 에너지를 감지하며 흥미로워했다. 간혹 이슬이 물건 값을 치르기 위해 지갑을 열 때면, 그녀는 잠시 바깥의 빛을 보며 새로운 경험에 즐거워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그때였다. 좁은 통로를 지나던 중, 앞서 가던 이슬의 어깨에 누군가 강하게 부딪혔다. “죄송합니다!” 남자는 짧게 사과하며 빠르게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이슬은 몸의 균형을 잡으며 괜찮다고 손짓했지만, 뭔가 싸늘한 기운을 느꼈다.

“이슬 언니! 저… 언니한테서 멀어지고 있어요…!”

갑작스러운 주홍의 텔레파시였다. 이슬은 순간 온몸에 피가 식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황급히 가방을 확인했다. 가방 안쪽의 지퍼가 미묘하게 열려 있었고, 그 안에 있어야 할 반지갑으로 변한 주홍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루아! 지갑이 사라졌어!” 이슬의 다급한 목소리에 루아도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방금 그 사람이야! 소매치기였어!”

두 무녀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들은 인간의 법과 질서를 거스르지 않는 한, 자신들의 힘을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작은 새로 변신해 남자를 쫓아가고 싶었지만, 인파 속에서 무녀로서의 정체를 드러낼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그들의 가장 소중한 자매, 주홍이 지금 인간 세상의 어딘가를 떠돌고 있었다.

당황스러움 속에서 루아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이슬을 이끌어 가장 가까운 경찰서로 향했다. 그들은 소매치기 사건을 신고했고, 무녀의 힘으로 기억한 범인의 인상착의를 상세히 설명했다. 동시에 신사에 있는 명아에게 다급한 텔레파시를 보냈다.

“명아! 지금 당장 휴대폰으로 변신해서 전화 대기해 줘! 경찰 쪽에서 연락 올 거야!” 루아의 목소리에는 초조함이 역력했다. 명아는 영문을 몰랐지만, 루아의 다급함에 망설임 없이 스마트폰으로 변신해 전화를 기다렸다. 주홍은 텔레파시를 통해 자신이 버스에 타고 있으며, 지나가는 거리의 풍경을 단편적으로 전달했다. 그녀의 의식이 외부 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것이 아니었기에, 다른 무녀들은 최소한 그녀의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몇 시간 후,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명아는 루아와 이슬에게 텔레파시로 그 소식을 전했다.

“잡았대. 그 소매치기. 그런데… 지갑은 발견하지 못했대.”

루아와 이슬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서로를 바라봤다. 주홍이 텔레파시로 위치를 계속 알려주고 있었는데도, 지갑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경찰의 수색 범위는 한정적이었고, 소매치기가 지갑을 버리거나 다른 공범에게 넘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 순간, 주홍의 텔레파시가 절규에 가까운 공포를 담아 터져 나왔다.

“언니들… 저… 저 이대로 영영… 신사 경계 안으로 못 돌아가면… 지갑 모습으로… 영겁의 시간을…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거예요? 흐윽… 그럴 수도 있는 거죠…?”

루아와 이슬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주홍의 질문은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던, 무녀로서의 가장 원초적이고 끔찍한 공포를 건드린 것이었다. 그들은 속으로 나지막이 되뇌었다.

그렇네… 그럴 수도 있겠네…?

세상에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었지만, 무녀의 변신만은 예외였다. 신사의 경계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그들은 변신한 형태로 영원히 존재해야만 했다. 그들이 지금껏 잊고 살았던, 불멸의 저주와도 같은 진실이었다. 시장의 활기찬 소음은 이제 그들에게 아무 의미 없는 배경음으로 변해버렸다. 주홍의 공포는 그들 모두의 공포가 되어, 차가운 현실로 다가왔다.[8:1]


침울함이 신사의 고즈넉한 공기마저 무겁게 짓누르는 듯했다. 루아와 이슬은 축 늘어진 어깨로 뜰을 가로질러 본당으로 향했다. 평소의 활기 넘치던 발걸음은 온데간데없고, 한 걸음 한 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그들의 얼굴에는 피로와 함께 지울 수 없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신사 깊숙한 곳, 거대한 목조 기둥들 사이로 드리워진 햇살 아래에서 큰 무녀님이 고요히 앉아 있었다. 그녀의 아바타는 늘 그렇듯 자애롭고 온화했지만, 그들의 모습을 본 순간 눈빛에 깊은 우려가 스쳤다.

“괜찮으냐, 너희들. 무슨 일이 있었던 게로구나.” 큰 무녀님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통찰이 담겨 있었다.

루아는 고개를 들고 간신히 상황을 설명했다. “큰 무녀님… 주홍이가… 지갑으로 변신했다가 소매치기를 당했습니다. 경찰이 범인은 잡았지만, 지갑은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텔레파시는 계속 연결되지만… 주홍이가 너무 절망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경계 안으로 돌아오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끝으로 갈수록 가늘게 떨렸다. 이슬 역시 고개를 떨군 채 입술을 깨물었다.

큰 무녀님은 잠시 침묵했다. 이내 그녀의 시선이 두 무녀의 불안한 눈빛에 닿았다.

“너희는… 옛날 옛적, 무녀의 힘을 악용하던 자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기억하느냐?”

루아와 이슬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신사의 역사 중 가장 어둡고 금기시되는 부분이었기에, 그 내용만큼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때 힘을 오만하게 휘두르던 무녀들은 어떻게 되었을 것 같으냐?” 큰 무녀님의 질문은 단순한 물음이 아니었다. 그들의 기억 속을 파고드는, 마치 깊은 샘물을 젓는 듯한 질문이었다.

두 무녀의 눈이 크게 뜨였다. 머릿속으로 번개처럼 섬광이 스쳐 지나갔다. 힘을 악용하고, 사람들을 해치고, 오로지 자신만의 이득을 위해 변신 능력을 남용했던 무녀들. 그들은 결국… 변신한 형태로 영원히 세상에 갇히는 저주를 받았다고 했다. 영원히 특정 사물로 고정되어 버려, 신사의 경계로 돌아올 수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는 채로.

그들은 자신들의 질문이 바로 그 끔찍한 가능성을 향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지갑으로 변한 채 세상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주홍의 모습이 마치 그 형벌을 받은 옛 무녀들의 모습과 겹쳐지는 듯했다. 숨이 막힐 듯한 깨달음이었다.

큰 무녀님은 고통스러워하는 그들의 표정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이윽고 그녀의 목소리는 다시금 자애로운 울림을 되찾았다.

“그것은 너희가 잊지 말아야 할 오래된 경고다. 옛날 옛적, 무녀의 힘을 오만하게 휘두르며 세상의 균형을 깨뜨린 자들에게 내려진 형벌이었지. 그들은 변형된 몸으로 영원히 갇히는 저주를 받았다. 하지만 너희는 다르다. 너희는 선한 의지로 세상을 지키고 있다. 너희가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행하고 있지 않느냐.”

큰 무녀님은 한숨을 쉬었다. “신님은… 너희가 그 길을 잃지 않는 한, 결코 그런 절망에 너희를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의 진심과 믿음이 곧 너희의 구원이 될 테니.”

그 말은 마치 차가운 겨울밤, 희미하게 타오르는 불씨처럼 두 무녀의 얼어붙었던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완전히 불안감이 가시지는 않았다. 주홍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그들이 직접 지갑을 되찾는 방법은 여전히 막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큰 무녀님의 말은, 그들이 완전히 버려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의 씨앗을 심어주었다.

루아가 먼저 이슬의 손을 꽉 붙잡았다. 이슬 또한 루아의 손을 마주 잡았다. 서로의 손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가 불안감을 조금이나마 덜어주었다. 지난 시간 동안, 그들은 수많은 기적 같은 순간들을 경험했다.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신의 축복이 늘 그들과 함께했음을 기억했다.

“응. 언니.” 루아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 우리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지.” 이슬의 목소리에도 희미하게나마 결의가 담겨 있었다.

그들은 주홍을 되찾을 방법을 반드시 찾아내리라 다짐하며, 서로에게서 위안과 용기를 얻었다. 신사의 고요함 속에서, 두 무녀의 손은 단단히 얽혀 있었다.[8:2]


밤은 깊었지만 신사의 고요함은 루아와 이슬의 불안감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원래 잠이 필요 없는 몸이었으나 인간 시절의 습관처럼 잠을 청하곤 했던 그들은, 그날만큼은 잠을 완전히 잊은 채 본당에 남아 자리에 없는 주홍을 떠올리며 침묵에 잠겼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루아가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그녀는 큰 무녀님의 말씀을 주홍에게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루아와 이슬은 정신을 집중하여 멀리 떨어진 주홍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비록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무녀들 간의 연결은 공간을 초월했다. 루아는 큰 무녀님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주홍의 의식 속으로 흘려보냈다.

“…너희가 그 길을 잃지 않는 한, 결코 그런 절망에 너희를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의 진심과 믿음이 곧 너희의 구원이 될 테니.”

주홍의 텔레파시가 처음에는 미약하게, 이내 안도감이 섞인 희미한 흐느낌과 함께 되돌아왔다. 그녀는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었지만, 큰 무녀님의 말씀이 주는 강력한 믿음은 그녀의 영혼을 조금씩 안정시켰다. 한참을 그렇게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위로를 주고받은 후, 주홍의 의식이 이전보다 또렷해졌다.

“언니들… 제가 지금… 어딘가 축축하고… 냄새나는 곳에 있는 것 같아요. 아마… 쓰레기통… 아니면 그런 비슷한 것 같아요.”

그 말에 루아와 이슬은 절망 속에서도 한 줄기 희망을 발견했다. 적어도 길바닥에 버려지거나 위험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신사는 이른 아침부터 분주해졌다. 루아와 이슬은 인간 세상에서 활동하는 데 익숙한 몇몇 무녀들을 더 대동하고 마을로 급히 내려갔다.

그들의 임무는 마을의 모든 쓰레기통을 쥐잡듯이 뒤지는 것이었다. 쓰레기 수거일이 바로 다음 날로 잡혀 있었기에, 그날 안에 주홍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녀는 소각장이나 매립지, 혹은 더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할 위험이 있었다. 시간은 촉박했고, 손발이 부족했다. 루아는 결국 서연에게도 다급히 연락을 취했다. 서연은 영문을 몰랐지만, 루아의 목소리에 담긴 절박함을 느끼고 지체 없이 달려왔다. 그녀는 비록 무녀의 능력은 없었지만, 날카로운 직관과 남다른 문제 해결 능력을 가진 이였다.

마을 곳곳의 쓰레기통은 예상보다 훨씬 많았다. 무녀들은 번갈아가며 주변을 경계하고, 서연과 함께 쓰레기봉투를 뒤집어엎고 내용물을 살폈다. 역겨운 냄새와 끈적이는 오물이 그들의 옷과 손을 더럽혔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주홍을 되찾아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한참을 수색하던 그때였다. 주홍의 텔레파시가 예전보다 훨씬 선명하게 들려왔다. “언니들! 제 근처에서 언니들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아주 가까이에 있어요!”

그 말에 모두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수색 범위를 좁혔다. 낡고 녹슨 철제 쓰레기통, 그 안쪽 깊숙이 처박혀 있는 비닐봉투 더미 사이에서 희미하게 붉은색과 흰색이 섞인 무언가가 보였다. 루아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것을 꺼냈다.

흙먼지와 정체 모를 액체들로 범벅이 되어 더러워져 있었지만, 분명히 주홍이 변신했던 바로 그 반지갑이었다. 작고 세련되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찌그러지고 얼룩진 채 볼품없이 변해 있었다. 하지만 모두의 얼굴에는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드디어 찾았다.

일단 지갑을 가져가기 위해 근처 공중화장실로 향했다. 루아와 이슬은 조심스럽게 비누와 물로 지갑을 씻어냈다. 끈적이는 오물이 떨어져 나가고, 흙먼지가 씻겨나가자 본래의 붉고 흰색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으으, 간지러워요… 근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요.” 주홍의 텔레파시에는 간지러움과 함께 감출 수 없는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수도 없이 목욕을 해왔지만, 그렇게 더러워진 상태에서 깨끗하게 씻겨지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공포와 절망의 끝에서 찾아온 이 깨끗함은 그 어떤 쾌락보다 강렬한 안도감을 선사했다.

신사 경계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주홍의 몸은 부드러운 빛과 함께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고, 발을 딛고 있는 신사의 마루를 느끼며 다시 살아났다는 안도감에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곧바로 큰 무녀님이 계신 본당으로 달려갔다. 큰 무녀님은 그녀가 돌아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고요히 미소 짓고 있었다.

“큰 무녀님… 정말… 두려웠습니다. 이대로 영영… 갇혀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큰 무녀님의 말씀을 듣고, 언니들이 저를 찾아주는 모습을 보면서…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주홍은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녀는 이제 알았다. 진정한 절망은 육신이 갇히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의 선한 의지를 잃어버리는 데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이 함께하는 한, 어떤 형태의 절망에서도 서로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밤사이의 공포와 아침의 수색, 그리고 극적인 재회는 무녀들에게 변신 능력의 축복 뒤에 숨겨진 또 다른 얼굴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그들은 더욱 단단해진 신뢰와 서로에 대한 깊은 유대감을 품게 되었다.[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