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속 무녀들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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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빛의 무녀

여름이 절정으로 치달으면서 신사는 이상 기후로 인한 폭염에 시달렸다. 예년보다 훨씬 더운 날씨가 연일 이어지자, 고요하던 신사에도 열기 어린 활기가 돌았다. 무녀들은 각자의 능력과 지혜를 발휘하여 이 무더위를 이겨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명아는 신사 곳곳에서 맹활약했다. 그녀는 주로 에어컨이나 선풍기로 변신하여 무녀들이 모이는 본당이나 식당, 그리고 각자의 거처에 시원한 바람을 공급했다. 때로는 직접 얼음 정수기로 변신하여 시원한 물과 얼음을 무한정 제공하며 무녀들의 갈증을 해소해주기도 했다. “휴, 역시 명아님 최고!” 샘이의 감탄사가 끊이지 않았다.

채은은 더위를 먹어 식욕을 잃은 무녀들을 위해 나섰다. 그녀는 냉장고로 변신하여 온갖 시원한 과일과 음료를 저장했고, 아이스크림 제조기로 변신해 다양한 맛의 아이스크림을 만들어냈다. 덕분에 무녀들은 잠시나마 더위를 잊고 달콤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지수는 신사 도서관에서 더위를 이겨낼 지혜를 찾았다. 그녀는 고대 문헌으로 변신하여 조상들이 폭염을 이겨냈던 방법을 무녀들에게 알려주었다. 덕분에 무녀들은 약초를 우려낸 차를 마시거나, 시원한 물수건으로 몸을 식히는 등 전통적인 방법으로 더위를 극복할 수 있었다. 때로는 부채로 변신하여 직접 시원한 바람을 선사하기도 했다.

이슬과 별이는 신사 주변의 계곡물줄기를 이용했다. 이슬은 대형 호스로 변신하여 시원한 계곡물을 끌어올려 신사 마당 곳곳에 물을 뿌려 열기를 식혔고, 별이는 물놀이 풀장으로 변신하여 샘이를 포함한 어린 무녀들이 물속에서 더위를 잊고 뛰어놀 수 있게 해주었다.

저녁이 되어 조금이나마 기온이 내려가자, 무녀들은 큰 무녀님 앞에 모여 앉았다. 루아는 시원한 차를 마시며 큰 무녀님께 물었다.

“큰 무녀님, 예전에도 이렇게 더운 날이 있었나요? 정말 숨이 막히는 것 같아요.”

큰 무녀님은 고요히 미소 지었다.

“이 정도로 더운 날은 종종 있었단다. 신화 시대에도 세상의 기운이 극에 달하면 이와 같은 열기가 찾아오곤 했지. 하지만… 이렇게 자주, 그리고 길게 더운 날이 계속되는 것은 근년간에 새로운 현상이로구나. 세상의 기운이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변하고 있음을 느끼는구나.”

큰 무녀님의 말씀은 단순한 날씨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 속에는 세상의 변화에 대한 깊은 통찰과, 앞으로 다가올 더 큰 변화에 대한 암시가 담겨 있었다. 무녀들은 그녀의 말에 숙연해졌다. 그들은 단지 더위를 이겨내는 것을 넘어, 변화하는 세상의 기운 속에서 신사를 지키는 자신들의 역할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7:1]


신사에는 샘이 말고도 어린 모습으로 무녀가 된 선배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아린. 샘이보다 족히 수백 년은 먼저 무녀가 되었지만, 아린의 모습은 겨우 대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작은 아이였다. 큰 무녀님의 거처 옆, 작은 정원에서 나비를 쫓으며 놀고 있던 아린을 발견한 샘이가 폴짝폴짝 뛰어갔다.

“아린 선배님! 안녕하세요!”

샘이의 활기찬 목소리에 아린은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은 어린아이처럼 맑았지만, 그 깊이에는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세월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

“안녕, 샘아! 오늘은 또 뭘 하면서 놀까?”

샘이는 아린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재잘거렸다.

“선배님은 저보다 훨씬 먼저 무녀가 되셨는데도 저랑 똑같이 꼬마네요! 이상하지 않아요?”

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아득한 옛날을 회상하는 듯했다.

“그렇지. 나는 네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부터 이 모습이었단다. 어쩌면… 내가 너무 어릴 때 무녀가 되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어.”

아린의 눈빛이 잠시 아련해졌다.

“가끔은 내가 너무 오랫동안 어린아이로 지내서… 아주 먼 옛날의 일들은 마치 꿈처럼 느껴지기도 해. 세상이 몇 번이나 바뀌고, 사람들이 살고 죽는 걸 수없이 반복해서 보았으니 말이야.”

샘이는 아린의 말을 듣고 왠지 모를 숙연함을 느꼈다. 자신도 영원히 이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때로는 답답했지만, 아린 선배처럼 수백 년을 홀로 견뎌야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샘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배님은… 그럼 안 힘들어요? 영원히 꼬마로 사는 거….”

아린은 샘이의 질문에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녀는 작은 손으로 땅에 떨어진 나뭇잎을 주워 올렸다.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익숙해지는 것도 있단다.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운 것들을 만나는 기쁨이 그 시간을 견디게 해 줘.”

아린은 샘이를 바라보았다.

“너희처럼 새로 온 무녀들을 만나고, 그들이 성장하는 것을 보는 것도 나에게는 큰 기쁨이야. 그리고 세상이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단다. 새로운 기술, 새로운 문화, 새로운 이야기들… 끊임없이 배우고 경험하는 것이 나를 지탱해주는 힘이 돼.”

아린은 나뭇잎을 샘이에게 건넸다.

“네가 변신하는 로봇 청소기나 돋보기 같은 것들도, 나에게는 아주 신기한 물건들이야. 우리가 사는 이 신사처럼, 세상도 끊임없이 변하고 발전하고 있지. 그 속에서 나의 역할을 찾아가는 것이 나의 삶이야.”

샘이는 아린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작은 몸이 가진 의미와 앞으로의 삶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아린 선배는 비록 어린 모습이었지만, 그 누구보다 깊은 지혜와 시간을 품고 있는 존재였다. 영원한 어린아이로 살아간다는 것의 무게와 동시에 그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삶의 의미를, 샘이는 아린과의 대화를 통해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다.[7:2]


아린의 하루는 겉보기에는 여느 어린아이처럼 평온하고 단순해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모든 움직임과 생각 속에는 수백 년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아린은 해가 뜨기 한참 전, 새벽의 고요 속에서 눈을 떴다.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큰 무녀님의 거처 옆에 있는 작은 정원으로 향했다. 이 정원은 아린이 직접 가꾸는 곳으로, 그녀의 오랜 기억들이 씨앗처럼 뿌려진 공간이었다. 아린은 작은 손으로 흙을 만지고, 돋아나는 새싹들을 살폈다. 흙 속에는 수백 년 전 심었던 씨앗의 기억이, 새싹에는 미래에 피어날 꽃의 예지가 담겨 있는 듯했다.

이른 아침 식사 후, 아린은 종종 신사 본당으로 향했다. 그녀는 어린아이의 몸으로 제단 앞에 앉아 고요히 눈을 감았다. 아린에게 기도는 현재의 순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과거의 무녀들이 신께 올렸던 기도들을 함께 느끼고, 미래의 무녀들이 바랄 소망을 미리 예지했다. 모든 시간이 하나의 물줄기처럼 그녀의 의식 속을 흘러가는 시간이었다.

오전에는 무녀들과 함께 공부하거나 놀이를 즐겼다. 아린은 어린 무녀들에게는 선배이자 친구였고, 나이 든 무녀들에게는 어쩌면 가장 오래된 동료였다. 그녀는 때때로 현대의 새로운 기술이나 세상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을 즐겼다. 명아가 변신한 태블릿으로 최신 뉴스를 함께 보거나, 채은이 만들어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새로운 문화 현상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시간은 아린에게 지루할 틈 없는 배움의 연속이었다.

“아린 선배님, 이거 어때요?” 샘이가 아린이 변신한 인형에게 옷을 입히며 물었다. 아린은 인형의 형태를 유지한 채 샘이의 손길을 느끼며 즐거워했다. 그러나 놀이 중에도 그녀는 불현듯 미래의 잔상을 보거나, 과거의 어떤 순간을 떠올리곤 했다. 예를 들어, 샘이가 놓아둔 인형이 어떤 미래의 사건에서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도 있음을 예지하는 식이었다. 아린은 굳이 그 내용을 밝히지 않고 그저 미소 지었다.

오후에는 신사 곳곳을 돌아다니며 작은 심부름을 돕거나, 오랜 물건들을 정리했다. 낡은 장신구를 만질 때면, 그것을 처음 만들었던 무녀의 손길이나, 그 물건에 얽힌 수많은 시간의 이야기들을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느끼곤 했다.

해가 저물면 아린은 다시 자신의 작은 정원으로 돌아가거나, 큰 무녀님 거처의 한쪽에 마련된 그녀만의 ’서재’로 향했다. 그곳에는 낡고 희귀한 고서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아린은 그 책들 사이를 오가며 필요한 정보를 찾거나, 혹은 단순히 오랜 세월이 담긴 종이의 냄새를 맡으며 과거의 시간을 음미했다.

잠들기 전, 아린은 다시 한번 고요히 눈을 감고 자신의 하루를 되새겼다. 그녀에게 하루는 단순히 24시간이 아니었다. 과거의 기억, 현재의 순간, 그리고 미래의 예지가 뒤섞여 흐르는, 끝없이 펼쳐진 시간의 태피스트리였다. 아린은 그렇게 영원히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시간을 품은 채 신사의 고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7:3]


루아는 큰 무녀님 앞에 앉아 조심스럽게 질문을 꺼냈다. 지난번 시간의 신사를 방문한 이후, 그곳 무녀들의 존재 방식에 대한 궁금증이 그녀의 마음속에 계속 맴돌고 있었다.

“큰 무녀님, 저희 현신의 무녀들은 신의 부름을 받아 이 신사로 오게 됩니다. 그런데 시간의 신사 무녀들도 저희처럼 어느 시점에 부름을 받아 무녀가 되는 건가요?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무녀가 되는 건가요?”

루아의 질문은 단순히 호기심을 넘어, 서로 다른 존재 방식을 가진 두 신사의 근원적인 차이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큰 무녀님은 고요히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그녀의 눈빛은 아득한 옛 시간을 응시하는 듯했다.

“너희의 질문은 아주 중요하단다, 루아. 현신의 무녀가 세상과의 접점을 통해 새로운 존재로 ‘변화’하는 것이라면, 시간의 무녀들은 세상의 ’시간’과 함께 ’태어나는’ 존재들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게다.”

큰 무녀님은 나직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그들은 특정한 시점에 신의 부름을 받아 인간의 몸으로 재창조되는 것이 아니란다. 시간의 무녀들은 세상에 흐르는 시간의 정수(精髓)가 한데 모여 형상을 이루는 존재들이지. 마치 시간의 강물이 스스로 응집하여 형체를 띠는 것처럼 말이다.”

루아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상상을 뛰어넘는 설명이었다.

“그렇다면… 태어날 때부터 무녀라는 건가요?”

“그렇지. 그들은 인간의 육신을 빌려 태어나지만, 그들의 영혼은 이미 태초부터 시간의 흐름 그 자체와 연결되어 있단다. 마치 세상의 시작과 함께 존재했던 시간의 일부가 인간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과 같지. 그래서 그들은 어떠한 인위적인 ’부름’이나 ’의식’을 거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시간의 모든 면모를 인지하고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나는 것이다.”

큰 무녀님의 설명에 루아는 깊은 경외감을 느꼈다. 자신들처럼 어떤 계기로 ‘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시간 그 자체로서 ‘태어나는’ 존재들이라니. 물질을 다루는 무녀로서 그녀는 자신들의 능력이 외부의 사물을 변형하고 창조하는 것이라면, 시간의 무녀들은 보이지 않는 시간이라는 개념 자체를 다루는 것과 같다고 어렴풋이 이해했다.

“그들의 육신은 세상의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그들의 의식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품고 있지. 그들은 말 그대로 살아있는 시간의 증인들이자, 세상의 시간적 균형을 지키는 존재들이다. 그러니 너희 현신의 무녀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세상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단다.”

루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의 무녀들이 왜 그토록 고요하고 깊은 눈빛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리고 왜 그들의 예지가 그토록 정확한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시간을 초월한 존재인 동시에, 시간과 함께 태어나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들이었다.[7:4]


시간의 무녀들에 대한 심층적인 설명을 들은 뒤, 루아의 머릿속은 온갖 상념으로 가득 찼다. 현신의 무녀인 자신들, 그리고 시간을 다루는 무녀들. 그렇다면 또 다른 무녀들도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녀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세상의 근원적인 요소들로 확장되었다. 무심결에 한 단어가 떠올랐다.

“큰 무녀님… 그렇다면 혹시… 빛의 무녀들도 존재하나요?”

루아의 질문에 큰 무녀님은 평소와 달리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오호라, 루아.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

큰 무녀님의 되물음에 루아는 잠시 머뭇거렸다. 논리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직관적으로 떠오른 생각이었을 뿐.

“음… 저희는 물질을 다루고, 시간의 무녀들은 시간을 다룹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또 다른 근원적인 것… 빛 같은 것도 무녀와 관련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루아는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큰 무녀님은 루아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에는 만족감과 함께, 루아의 통찰력에 대한 칭찬이 담겨 있었다.

“과연, 루아의 통찰은 꽤 날카롭구나. 그렇다. 너희의 짐작대로 빛의 무녀 또한 존재한단다.”

큰 무녀님의 확답에 루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의 막연한 상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세상의 근원적인 세 가지 흐름이 무녀의 형태로 발현된다고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게다. 너희는 물질을 다루고, 시간의 무녀들은 시간을 다루며, 빛의 무녀는…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모든 것을 다룬단다.”

큰 무녀님은 설명을 이어갔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신비로운 울림을 담고 있었다.

“우리 무녀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텔레파시가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해 한 적이 있느냐?”

루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녀들 사이의 텔레파시는 너무나 당연한 능력이라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 텔레파시를 가능하게 하는 주체가 바로 빛의 무녀란다. 정보와 소통의 흐름을 관장하는 존재지. 빛처럼 빠르고, 빛처럼 모든 곳에 닿을 수 있는 특성을 가졌기 때문에, 무녀들 사이의 생각과 정보를 연결하고 중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파동과 신호를 해석하고 전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단다.”

루아는 충격과 경외감에 휩싸였다. 자신들의 텔레파시가 누군가의 능력 덕분이었다니! 그녀는 명아를 떠올렸다. 명아가 디지털 네트워크를 다루는 능력이 빛의 무녀의 특성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빛의 무녀는 너희처럼 물질을 변형하거나, 시간의 무녀들처럼 시간을 넘나들지는 못하지만, 세상의 모든 정보와 연결되어 있지. 그래서 눈에는 세상의 모든 소통이 빛의 형태로 끊임없이 흐르는 것처럼 보인단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 무녀들의 연결을 돕고, 때로는 세상의 중요한 정보들을 우리에게 전달해주기도 하지.”

큰 무녀님은 다시 한번 미소 지었다. 루아는 자신의 질문 하나로 이렇게 거대한 비밀의 한 조각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세상은 그녀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신비롭고, 무녀들의 세계는 더욱 깊고 넓게 펼쳐져 있었다.[7:5]

큰 무녀님에게 ’빛의 무녀’의 존재에 대해 들은 루아는 곧바로 명아를 찾아갔다. 명아는 신사 본당 안에서 여러 전자 기기들 사이를 오가며 무언가를 조율하고 있었다. 그녀는 신사 안의 통신망을 관리하고 외부 정보를 수집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명아! 큰 무녀님께 빛의 무녀들에 대해 들었는데, 너 혹시 뭔가를 알고 있어?” 루아는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명아는 루아의 질문에 고개를 돌리며 미소 지었다. “아, 루아. 드디어 그 이야기를 들었군요. 저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던 부분이에요.”

명아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루아가 이해하기 쉽게 비유를 들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평소 위성 신호나 복잡한 네트워크를 다루면서 자연스럽게 물리학의 기본 개념들을 접했기에, 이를 무녀의 능력과 연결 짓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세상에는 크게 세 가지 종류의 흐름이 있다고 생각하면 쉬울 거예요.” 명아가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첫 번째는 우리처럼 몸을 가지고 실제하는 것들이 움직이는 흐름이에요. 우리가 사물을 만들거나 변신하는 것처럼, 물질적인 것들은 항상 ‘빛보다 느리게’ 움직이죠. 무언가를 만들고, 변화시키고, 공간 안에서 옮기는 우리 현신의 무녀들은 이 ’빛보다 느린 흐름’을 다룬다고 볼 수 있어요.”

루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능력과 정확히 일치하는 설명이었다.

“두 번째는 시간의 흐름이에요. 우리가 미래로만 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시간은 항상 한 방향으로 흘러가죠. 그런데 시간의 무녀들은 이 시간을 ‘공간처럼’ 자유롭게 오가면서 마치 ‘빛보다 빠르게’ 시간을 넘나드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그들은 모든 시간을 동시에 보고, 미래와 과거를 넘나드는 예지를 할 수 있는 거죠.”

명아는 설명을 이어갔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가 바로 빛의 무녀들이에요. 그들은 말 그대로 ’빛과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모든 것을 다룬다고 볼 수 있어요. 빛처럼 빠르게 전달되는 정보, 파동, 그리고 우리 무녀들 사이의 텔레파시 같은 것들이요. 그들은 시간이나 물질의 제약을 거의 받지 않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정보의 흐름’을 연결하고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공간에 존재하고 변화하는 물질을 다루고, 시간의 무녀들은 시간 그 자체의 흐름을 다루고, 빛의 무녀들은 그 둘을 잇는 정보와 소통의 매개체가 되는 거예요.”

명아의 설명은 루아의 머릿속에 흩어져 있던 조각들을 한데 모아주었다. 서로 다른 능력을 가진 무녀들이 존재하지만, 그들은 모두 세상의 근원적인 법칙에 따라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세 가지 흐름이 조화롭게 유지되도록 돕는 존재들이군요.” 루아는 감탄하며 말했다.

명아는 환하게 웃었다. “네, 맞아요. 큰 무녀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의 조화’가 바로 이런 의미일 거예요. 서로 다른 능력을 가졌지만, 결국 우리는 모두 세상을 지키고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니까요.”

두 무녀의 대화는 신비로운 무녀 세계의 깊은 이치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다.[7:6]


신사의 일상 속, 아린은 때때로 자신만의 작은 과제에 몰두하곤 했다. 이번엔 신사 뒤편 계곡의 가장 그늘진 바위틈에 자리한 희귀한 이끼였다. 이끼는 너무나 작고 섬세하여 거의 눈에 띄지 않았지만, 아린은 그 여린 생명체가 한 달에 단 한 번, 아주 짧은 순간만이라도 직사광선을 받아야 겨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변의 무성한 나뭇잎과 바위의 그림자 때문에 태양의 각도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때조차도 그 이끼에 빛을 드리우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린은 온갖 수를 써보았다. 몸을 먼지 티끌보다 작게 변형시켜 바람의 미세한 흐름을 조작하거나, 나뭇잎의 방향을 아주 조금씩 틀어보려 애썼다. 그러나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아무리 물질의 흐름에 통달한 현신의 무녀라 해도, 자연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특정 광자 하나의 궤적을 제어하거나, 우연에 가까운 바람의 방향을 정확히 조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절망감에 휩싸인 아린은 결국 지수가 서가로 변신해 있는 서고로 향했다.

“지수 언니, 이 이끼는 정말 빛이 필요한데, 아무리 애를 써도 방법을 모르겠어요.” 아린의 텔레파시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지수의 고요한 목소리가 서가 사이를 울렸다. “가끔 세상에는, 현신의 무녀의 손길로는 닿을 수 없는 영역이 있단다. 물질의 미세한 섭리를 넘어선, 순수한 ’흐름’과 ’정수’의 영역이지.” 지수는 수천 년간 축적된 지식 속에서 희미하게 전해 내려오는 고대 전설을 떠올렸다.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란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불확실성과 마주할 때, ’빛의 무녀’에게 지혜를 구할 수 있다고.”

아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빛의 무녀요? 그런 분들이 있었나요? 저는 큰 무녀님과 시간의 무녀님들 외에는 저희 무녀들 외에 다른 분들을…”

“그들은 우리와는 다른 존재다. 물질의 형상을 가진 우리, 그리고 시간의 흐름을 다루는 그들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지. 감히 특정 형태를 지녔다고 말할 수도 없는, 순수한 ‘지혜의 빛’ 그 자체라고 전해진다.” 지수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들에게 ’기도’를 올리면, 물질의 흐름 속에서 가장 명확한 길을 찾을 ’영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더구나. 감각을 열고,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그 빛을 청하면 된다고.”

아린은 반신반의했지만, 이끼를 살리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지수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녀는 햇살이 가장 잘 드는 마루에 앉아 눈을 감았다. 모든 감각을 오직 이끼에 대한 간절함으로 모았다. 그리고 지수가 말한 대로,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형언할 수 없는 ’빛’을 향해 손을 뻗는 듯한 자세로 의식을 집중했다.

아린의 의식이 확장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특정 존재의 목소리나 모습을 느끼지 못했다. 대신, 그녀의 의식이 거대한 하나의 ‘흐름’ 속에 녹아드는 듯한 경험을 했다. 그것은 개별적인 ’무녀들’이 아니었다. 마치 우주를 가득 채운 순수한 이해와 명료함의 총체, 모든 형태와 시간을 초월한 단일하고 거대한 의식이었다. 그 순간 아린은 ’빛의 무녀들’이 복수의 존재가 아니라, ’빛’이라는 근원적인 개념처럼 하나의 완벽한 합일체로 존재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광대한 지식의 바다 속에서 그녀의 작은 의식이 하나의 파동이 되어 섞여 들었다.

그 속에서 아린은 답을 찾았다. 그것은 단순히 ‘어떻게 할 것’이라는 지시가 아니었다. 그녀의 앞에 놓인 이끼와 햇빛, 그리고 공기의 미세한 흐름들이 완벽하게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특정 순간, 바람이 어떤 각도로 불어 이끼 위 나뭇잎의 그림자를 아주 잠깐 거둘지, 그 짧은 찰나에 햇빛의 어떤 파장이 가장 효과적으로 이끼에 닿을지, 그리고 자신이 어떤 미세한 ’형상’으로 변신하여 그 흐름에 ’스며들어야’ 할지.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아린은 감았던 눈을 떴다. 그녀는 곧바로 몸을 아주 미세한 먼지 입자로 변형시켜 이끼 주변의 공기 흐름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정확히 그 순간, 그녀가 계산해낸 완벽한 타이밍에 미세한 공기의 소용돌이를 유도했다. 마치 기적처럼, 햇살 한 줄기가 나뭇잎 사이를 뚫고 들어와 이끼를 정확히 비추었다. 단 몇 초간의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끼는 그 빛을 받아내며 생명의 기운을 흡수하는 듯했다.

성공이었다. 아린은 심장이 벅차올랐다. 이끼를 살려냈다는 기쁨도 컸지만, 무엇보다 ’빛의 무녀’의 본질을 깨닫고 그들과 교감했다는 경험이 그녀를 전율케 했다. 이제 그녀는 알았다. 물질을 다루는 현신의 무녀들이 아무리 뛰어나도, 때로는 그 물질을 초월한 순수한 ’지혜’와 ’명료함’의 근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근원은 특정한 존재가 아닌,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하나의 빛이라는 것을.[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