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아가 드라이브에서 돌아와 큰 무녀님께 인사를 올리자, 큰 무녀님은 그녀를 잠시 앉으라고 청했다. 방금 전 하연이 가져온 편지가 그녀의 앞에 놓여 있었다. 큰 무녀님은 루아가 자신의 옆에 앉자 나직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루아, 세상의 큰 흐름이 우리 신사에도 닿기 시작했구나.”
루아는 큰 무녀님의 시선이 편지에 머무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이것이 서연과의 만남, 그리고 시간의 신사에서 들었던 ’큰 혼란의 시기’와 연관되어 있음을 느꼈다.
“이것은 인근 지역의 대규모 아파트 개발 계획서란다.”
큰 무녀님의 말에 루아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아파트 개발이라니, 이 신성하고 고요한 산속에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개발 계획에 따르면, 우리가 있는 이 산 전체가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탈바꿈하게 될 게다. 그리고 우리의 신사가… 그 개발 부지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더구나.”
큰 무녀님은 편지 속 도면을 가리켰다. 루아의 눈으로도 신사의 위치가 개발 계획의 한가운데 떡하니 박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저 건축 회사에서 신사 측에 토지 보상 건으로 연락을 해 온 것이었지.”
루아는 혼란스러웠다. “큰 무녀님… 신사가 토지 등록이 되어 있었다고요? 저희는 영적인 존재이고, 신사는 그냥 저희의… 몸의 일부 같은 것 아니었습니까?”
큰 무녀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하지만 세상의 이치는 세상의 방식대로 따라야 하는 법. 신사가 그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선, 세상의 법적 틀 안에서 실체를 가져야 한단다.”
그녀는 차분히 설명을 이어갔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 신사는 세상의 기준으로는 충분히 지혜롭지만 육체적으로는 지나치게 늙지 않은 무녀들이 번갈아 가며 법적인 소유주로 등록되어 있었단다. 신사의 본체인 나의 존재는 세상에 드러낼 수 없으니, 우리의 대외적인 창구가 필요했던 것이지.”
루아는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신사의 비밀을 유지하면서도 세상의 법 체계 안에서 존재하기 위한, 선대 무녀들의 지혜로운 방법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이슬이 그 역할을 맡아왔지. 하지만 이번 일은 단순한 보상 협상을 넘어설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너 루아가 그 다음 순번이란다.”
큰 무녀님의 말에 루아의 심장이 크게 울렸다. 이슬에 이어 자신이 신사의 법적인 주인이 되어 외부에 나설 차례가 온 것이다. 아파트 개발이라는 거대한 물결 앞에서 신사를 지켜야 하는 막중한 책임감이 루아의 어깨를 짓눌렀다.
하지만 동시에 루아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 거대한 개발의 물결 속에서 신사를 지키기 위해서는 외부 세계의 전문가, 특히 현재 세상의 흐름을 가장 잘 읽고 활용할 수 있는 이의 도움이 절실했다.
루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사람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서연…’
그녀는 지체 없이 자신의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지난번 서연과 헤어질 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고받았던 연락처를 찾기 위함이었다.[6:1]
루아는 서연의 연락처를 찾아냈지만, 이제는 어떤 방식으로 연락해야 할지가 문제였다. 그때, 옆에 있던 명아가 루아의 고민을 읽었는지 텔레파시를 보냈다.
“루아, 내가 도와줄게. 내가 변신하는 건 어때?”
명아는 몸을 빛내더니, 이내 매끈한 디자인의 최신형 스마트폰으로 변신했다. 루아는 명아의 완벽한 변신에 감탄하며 그녀의 몸인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터치 스크린에 서연의 이름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루아는 망설임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서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루아는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파트 개발 계획, 신사의 토지 보상 문제, 그리고 자신이 이 문제의 해결을 맡게 되었다는 사실까지. 루아의 목소리 속에는 신사의 존립이 걸린 절박함이 묻어났다.
서연은 루아의 설명을 듣는 내내 숨을 죽였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지난 모든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10년 전 갑작스러운 이별, 루아가 변신한 자동차, 그리고 그녀가 보여준 믿을 수 없는 능력까지. 그리고 이제, 그 모든 것이 바로 이 순간을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래서… 큰 무녀님은 나를 지은과 다시 만나게 해 주신 거구나. 어쩌면 이 순간을 위해….’
서연의 마음에 묘한 전율과 함께 형언할 수 없는 신비로움이 밀려들었다. 그녀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거대한 운명의 흐름 속에 자신이 놓여 있음을 깨달았다. 지은의 사라짐과 재회,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었다.
“지은아… 알겠어. 네가 왜 사라졌는지, 그리고 네가 왜 그 모습 그대로인지… 이제야 모든 게 설명이 되는 것 같아.”
서연의 목소리는 진동했지만, 그 속에는 단호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맹세코 비밀을 지킬 거야. 그리고 이 일… 내가 힘닿는 데까지 최대한 돕겠어. 네가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말해줘.”
루아는 서연의 진심이 담긴 목소리에 안도했다. 그녀는 명아에게 텔레파시로 고맙다는 마음을 전했다. 서연이 신사의 중요한 조력자가 될 것이라는 큰 무녀님의 예지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토지 보상이라는 것은 단순히 수용을 거부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대형 건축 회사는 막대한 자본과 법률 팀을 동원하여 신사를 압박해 올 것이 분명했다. 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상대의 약점, 즉 ’아킬레스건’을 찾아내야만 했다.
큰 무녀님의 지시 아래, 신사의 무녀들은 각자의 능력을 활용하여 건축 회사의 비리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지수는 신사 도서관의 모든 고서와 고문헌들을 훑으며 과거의 사례와 법률적 허점들을 찾아냈다. 그녀는 책장 그 자체가 되어 수많은 정보의 흐름 속에서 필요한 지식을 빠르게 추출해냈다.
명아는 스마트폰에서 다시 본래의 전자 기기 형태로 돌아와 세상의 복잡한 네트워크에 접속했다. 그녀는 건축 회사의 재정 상황과 과거 사업 이력, 위법 행위 등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회사의 재무제표, 계약 관계, 심지어는 관련 인물들의 비공식적인 정보까지, 그녀의 능력은 디지털 세계의 모든 정보를 샅샅이 뒤졌다.
샘이는 가장 작은 존재로서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데이터 저장 장치나 메모리 카드로 변신하여 중요한 정보가 담긴 곳에 잠입할 준비를 했다. 아주 작은 틈새를 통해서도 침투하여 필요한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었다.
루아 또한 서연과의 연락을 통해 외부 정보를 얻고, 신사 내부 무녀들의 조사 결과를 조율하며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현신의 무녀들이 각자의 능력을 총동원하여, 보이지 않는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신사의 존립을 건 거대한 싸움의 서막이 올랐다.[6:2]
무녀들의 조사가 진행될수록, ’XX 건축 회사’의 겉으로 드러난 화려함 뒤에 숨겨진 추악한 진실들이 하나둘씩 밝혀지기 시작했다. 명아의 전방위적인 디지털 탐색과 샘이의 은밀한 정보 확보 덕분에, 회사의 내부 상황은 낱낱이 파헤쳐졌다.
명아가 파악한 재무제표와 계약 정보들은 경악스러운 수준이었다. XX 건축 회사는 지난 몇 년간 눈부신 성장을 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 이면에는 무리한 프로젝트 수주와 과도한 차입 경영이라는 위험한 도박이 숨겨져 있었다. 대규모 국책 사업과 해외 프로젝트를 연이어 따내면서 몸집을 불렸지만, 실제로는 예상치 못한 원자재 가격 상승과 공기 지연 등으로 인해 수익성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빚이 빚을 부르는 구조였다. 회사의 현금 흐름은 이미 바닥난 지 오래였고, 은행 대출과 사채에 의존하며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재무 건전성은 이미 심각한 수준을 넘어 파산 직전의 위태로운 상태였다.
“회계 장부상으로는 그럴싸하게 꾸며놨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본이 거의 잠식된 상태입니다. 다음 분기 실적이 나쁘면 그대로 부도날 수도 있어요.” 명아의 텔레파시 보고는 냉정했다.
결국 이들은 한 방을 노리기 위해 이번 산림 아파트 개발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막대한 예상 수익을 통해 그동안의 부채를 탕감하고 회사를 회생시키려는 필사적인 시도였던 셈이다. 신사가 그들의 마지막 동아줄이었던 것이다.
재정 악화는 자연스럽게 더러운 손을 뻗게 만들었다. 무녀들이 파악한 정보는 단순히 재정적인 문제에 그치지 않았다. 회사는 이미 다양한 불법 행위에 연루되어 있었다.
가장 먼저 드러난 것은 하도급 업체에 대한 불공정 행위였다. 프로젝트를 수주하기 위해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으로 입찰한 뒤, 실제 공사에서는 하도급 업체에 비용을 전가하고 대금을 제때 지급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익을 남기고 있었다. 이로 인해 파산 직전에 내몰린 하도급 업체들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또한, 공사 과정에서의 환경 법규 위반도 심각했다. 폐기물 무단 투기, 오염 물질 방류, 그리고 환경 영향 평가를 조작하려 했던 정황까지 포착되었다. 이 모든 것이 공사 비용을 절감하려는 필사적인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샘이가 은밀히 잠입하여 확보한 내부 문건에서는 더욱 충격적인 내용이 발견되었다. 지역 인허가를 받기 위해 관련 공무원들에게 거액의 뇌물을 제공한 정황과, 일부 정치인들에게 불법적인 후원금을 건넨 기록들이 포착된 것이다. 또한, 경쟁 입찰 과정에서 담합을 통해 특정 프로젝트를 독점하려 했던 흔적까지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법과 윤리를 서슴없이 짓밟는 어둠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모든 정보를 취합한 무녀들의 얼굴에는 비장함이 감돌았다. 상대는 겉으로는 번듯한 대기업이었지만, 그 속은 썩어 있었다. 이 거대한 비밀을 쥐고 있는 한, 신사를 지킬 방법은 분명히 존재했다.[6:3]
신사에서 받은 정보를 손에 쥔 서연의 심장은 뜨겁게 고동쳤다. 이것은 단순한 특종이 아니었다. 거대 기업의 비리와 부패를 폭로하고, 억압받는 약자를 돕는, 기자로서의 사명감을 불태우는 거대한 싸움이었다. 서연은 잠도 줄여가며 자료를 분석하고 기사를 작성했다. 명아가 보내준 재무제표의 숨겨진 의미를 파헤치고, 샘이가 확보한 뇌물 장부의 흐름을 쫓았으며, 지수가 찾아낸 법률적 맹점을 기사의 핵심 논리로 삼았다.
마침내, 서연의 기사가 세상에 공개되었다.
[단독] XX건설, ‘황금 알 낳는 거위’ 산림 개발 뒤엔 부채더미와 불법
비리 의혹
- 수천억 원대 차입 경영, 파산 위기 속 ‘무모한 한탕주의’ 폭로
- 하도급 업체 쥐어짜기, 환경 규제 위반, 고위 공무원 뇌물 정황 포착…
‘검은 커넥션’ 의혹 일파만파
기사는 폭발적인 파급력을 가져왔다. 서연은 단순히 신사 부지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XX건설이라는 거대 기업의 무리한 프로젝트 수주, 재정 악화, 불공정 하도급, 환경 위반, 그리고 정관계 로비라는 거대한 비리 덩어리를 폭로했다. 그녀의 기사는 언론 전체를 뒤흔들었고, 시민들의 공분을 샀으며, 관련 기관의 철저한 조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서연의 기사는 곧 현실적인 파장을 일으켰다. 여론의 뭇매와 함께 정부 당국의 칼날이 XX건설을 향했다. 아파트 개발 프로젝트는 대국민 사과문 발표와 함께 전면 중지되었다. 이미 투입된 막대한 자금과 공정의 중단은 회사의 숨통을 조였다. 이어진 검찰 수사와 금융 당국의 압박 속에서, XX건설의 숨겨진 부채와 비리들이 속속들이 드러났다. 불법 로비에 연루된 공무원과 정치인들이 줄줄이 구속되었고, 회사의 신뢰도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단 한 달 만에, 한때 국내 굴지의 건설사였던 XX건설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회사는 채무를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도산했다. 수많은 직원들은 일자리를 잃었고, 주식은 휴지 조각이 되었다. 한 방을 노렸던 그들의 욕심은 결국 자신들을 집어삼켰다.
XX건설이 도산하자,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모든 자산은 채권 회수를 위해 경매에 넘어갔다. 여기에는 신사 주변의 광활한 산림 부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큰 무녀님의 지시 아래, 루아는 경매에 참여했다. 과거 이슬이 그랬듯, 이제 루아가 신사의 법적인 주인이자 외부와의 창구가 된 것이다.
루아는 명아의 정확한 정보력과 서연의 조언을 받아,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낮은 가격으로 신사 주변의 산림을 인수했다. XX건설의 파산으로 인해 급매물로 나온 부지였기에, 루아는 놀랍도록 헐값에 신사 주변의 광활한 산림을 매입할 수 있었다. 신사는 물질적인 위협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영역을 더욱 넓히게 된 것이다.
사건은 그렇게 종지부를 찍었다. 큰 무녀님의 예지대로 서연은 신사에 큰 도움이 되었고, 무녀들의 능력과 서연의 용기가 합쳐져 신사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루아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신사의 미래를 지켜냈다는 뿌듯함과 함께, 한층 더 막중해진 책임감을 느꼈다. 신사의 비밀은 여전히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채, 산속 깊은 곳에서 고요히 그 존재를 이어갔다.[6:4]
XX건설의 도산과 함께 신사 주변의 산림을 성공적으로 인수한 루아는 이제 명실상부한 신사의 법적 대표가 되었다. 며칠 뒤, 신사 본당 깊은 곳에서 토지 양도식이 간소하게 치러졌다. 큰 무녀님과 다른 무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슬은 자신의 이름으로 되어 있던 토지 소유권을 루아에게 정식으로 양도했다.
이슬은 루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제 너의 시대가 온 거야, 루아. 이 땅과 신사를 지키는 새로운 책임자로서, 너의 지혜를 마음껏 펼치렴.”
루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에 쥐어진 법적 서류의 무게는 단순히 종이 한 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사의 오랜 역사와 미래, 그리고 무녀들의 삶을 짊어진다는 막중한 책임감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역할이 단순히 변신하고 신의 뜻을 따르는 것을 넘어, 외부 세계와 직접적으로 소통하고 신사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날 오후, 신사의 경계 앞에서 익숙한 차량 한 대가 멈춰 섰다. 서연이었다. 그녀는 정갈한 정장 차림으로 차에서 내렸다. 기사가 폭로된 이후, 서연은 언론계의 뜨거운 감자가 되었고, 그녀가 쓴 기사는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녀는 승리의 기쁨보다, 자신을 믿고 엄청난 비밀을 공유해 준 신사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함을 표하고 싶었다.
별이가 변신한 신사 문이 조용히 열렸다. 서연의 시선은 곧 신사 경계 안쪽에 서 있는 큰 무녀님과 루아를 향했다. 큰 무녀님은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서연을 맞이했고, 루아는 자신의 ’옛 여자친구’이자 ’세상을 구한 조력자’인 서연을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서연은 경계 바로 앞까지 다가섰다. 그녀는 큰 무녀님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큰 무녀님, 서연입니다. 이번 일… 정말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진실을 세상에 알리고,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었습니다.”
큰 무녀님은 고요히 미소 지으며 답했다. “그대의 용기와 지혜 덕분이었단다, 서연 기자. 그대가 없었다면 신사는 큰 어려움에 처했을 게다.”
서연은 시선을 루아에게로 돌렸다. 영원히 변치 않을 루아의 모습은 그녀에게 여전히 경이로움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서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큰 무녀님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큰 무녀님… 지은이는… 저와는 달리 영원히 이 모습 그대로 살아갈 존재입니다. 부디…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지은의 특별한 운명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함께, 소중한 친구를 부탁하는 절절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큰 무녀님은 서연의 진심에 감동한 듯 따뜻하게 웃었다.
“염려 말거라. 지은이는 이곳에서 마땅히 받아야 할 보호와 사랑을 받을 것이다. 오히려 이번에 큰 신세를 졌다. 앞으로도… 종종 이렇게 얼굴 보여주렴. 세상의 소식을 전해주고, 때로는 우리에게 도움을 줄 사람이 필요할 테니 말이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큰 무녀님의 말씀은 서연을 신사의 단순한 조력자가 아닌, 중요한 연결고리로 인정하는 의미였다. 루아는 큰 무녀님과 서연을 번갈아 보았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뿌듯함과 함께,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차올랐다. 신사와 외부 세계를 잇는 새로운 연결점이 그렇게 형성되었다.[6:5]
지은이 무녀가 되기 전, 그녀와 서연의 관계는 풋풋하고도 아련한 첫사랑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급생이었다. 지은은 호기심 많고 엉뚱한 수다쟁이였고, 서연은 지은의 엉뚱함에 피식 웃으면서도 묵묵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차분한 성격이었다. 서로 다른 듯 닮은 두 사람은 어느새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 서연은 용기를 내어 지은에게 고백했다. 찌는 듯한 더위에도 불구하고 서연의 손은 땀으로 축축했다. “지은아, 나는… 네가 좋아. 친구 말고… 더 좋아해.” 서연의 떨리는 목소리에 지은은 순간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지은도 서연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같은 여자아이를 좋아한다는 감정이 무엇인지, 이 관계가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서연의 진심이 담긴 눈빛을 마주하자, 지은의 마음도 흔들렸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남몰래 연인이 되었다. 하교 후 아무도 없는 학교 운동장에서 손을 잡고 걷거나, 도서관 구석에서 나란히 앉아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책을 읽는 것이 그들의 소중한 비밀이자 일상이었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세상이 온통 빛나는 것 같았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도 있었지만, 서로를 향한 마음은 그 어떤 것보다 단단하다고 믿었다.
두 사람의 비밀 연애는 고등학교 1학년의 여름 방학 끝자락까지 이어졌다. 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기 며칠 전, 지은과 서연은 늘 그랬듯이 동네 어귀 작은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지은은 여느 때처럼 조잘조잘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서연은 지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그녀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평범하고도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때, 지은의 얼굴에 갑자기 알 수 없는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녀는 말을 멈추고 먼 산을 응시했다. “서연아… 나… 갑자기 가야 할 것 같아.” 지은의 목소리에는 당황스러움과 함께 어딘가 모를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서연은 영문을 몰라 지은의 손을 잡았다. “어딜 가? 무슨 일인데? 왜 그래, 지은아?”
하지만 지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눈빛은 무언가에 홀린 듯 아득해졌고, 몸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서연아.” 그 말을 마지막으로, 지은은 서연의 손을 놓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서연은 당황하여 지은의 뒤를 쫓았지만, 지은은 마치 연기처럼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것이 지은과 서연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갑작스럽고 설명할 수 없는 이별이었다. 지은은 그렇게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서연은 영문도 모른 채 첫사랑의 상실감과 혼란 속에서 기나긴 기다림을 시작해야 했다. 그녀는 지은이 남긴 마지막 표정, 그리고 텅 빈 하늘을 잊을 수 없었다. 10년이 지난 후 루아가 된 지은을 다시 마주하기 전까지, 서연은 그날의 일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6:6]
신사의 문제가 해결되고 얼마 뒤, 루아, 곧 지은은 서연에게 드라이브를 제안했다. 이번 드라이브는 임무가 아닌, 온전히 두 사람만을 위한 시간이었다. 지은은 자신의 몸을 다시금 익숙한 검은색 전기자동차로 변신시켰고, 서연은 조수석에 앉았다. 차는 도시 외곽의 한적한 도로를 따라 부드럽게 미끄러져 나갔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만큼이나 두 사람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학생 시절의 추억, 서로의 꿈, 그리고 10년의 공백 동안 겪었던 일들. 서연은 지은이 무녀가 되어 겪었을 삶의 변화를 조심스럽게 물었고, 지은은 신사의 비밀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일상을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그녀는 여전히 그 시절의 수다쟁이였고, 서연은 변함없이 그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청자였다.
“그때 내가 갑자기 사라져서 너 정말 놀랐지?” 지은의 분신이 머쓱하게 웃으며 물었다.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마. 너 정말 홀연히 사라졌잖아. 내가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알아? 혹시 나 때문에 사라진 건가 싶어서 얼마나 마음 졸였는데.”
“미안해… 정말 미안해, 서연아. 그때는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너무 갑작스럽게… 신사로 가게 돼서….” 지은의 목소리에는 그 시절의 아픔이 묻어났다. “솔직히 너 만났을 때, 네가 날 알아봐서 놀랐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좋았어. 다시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서연은 지은의 손을 잡았다. “나도 그래. 네가 그 모습 그대로 나타났을 때 얼마나 황당했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다시 만나 이야기할 수 있어서 너무 다행이야.”
대화가 깊어질수록, 지은은 자신의 ‘몸’ 안에 서연이 있다는 사실을 더욱 생생하게 느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인 자동차를 통해 서연의 모든 미세한 움직임을 감지했다.
“서연아, 네가 이렇게 내 안에 타고 있으면 말이야…”
지은의 분신이 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치 내 온몸의 신경세포 하나하나가 네 존재를 느끼는 것 같아. 네가 조수석 시트에 등을 기대는 압력, 안전벨트가 네 어깨를 지탱하는 미세한 진동, 네 숨결이 내 실내 공기를 채우는 것, 그리고 네 손이 내 대시보드를 스치는 따뜻한 감촉까지… 모든 게 다 느껴져.”
그녀는 마치 시적인 표현처럼 자신의 감각을 설명했다.
“네가 편안하게 앉아 있으면 내 서스펜션이 부드럽게 노면의 충격을 흡수하며 너를 감싸 안는 느낌이고, 네가 창밖을 보며 웃으면 내 차체가 함께 기분 좋은 공기의 흐름을 느끼는 것 같아. 마치 네 존재가 내 몸속을 흐르는 에너지처럼 느껴진달까? 그래서 네가 편안하고 행복하면 나도 온몸이 편안하고 기뻐지는 것 같아.”
지은은 빙긋 웃었다.
“때로는 내가 단순한 차가 아니라, 너의 감각과 연결된 살아있는 공간처럼 느껴지기도 해. 그래서 네가 기분이 좋으면 나도 모르게 가속 페달을 더 밟고 싶어지고, 네가 지루해 하면 더 흥미로운 길로 안내하고 싶어져. 네가 내 안에 있다는 걸 이렇게 온몸으로 느끼는 건… 정말 특별한 경험이야.”
서연은 지은의 말에 묘한 감동을 받았다. 자신이 타고 있는 이 차가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지은의 몸이자 살아있는 감각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경이로웠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움직임과 감정이 지은에게 전달되고 있다는 생각에 왠지 모를 따뜻함과 함께 책임감마저 느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가장 가까이에서 느끼며, 과거의 아픔을 치유하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드라이브를 이어갔다.[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