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의 전기자동차, 루아에게도 정기적인 자동차 점검의 때가 찾아왔다. 겉모습은 완벽해도 법적으로 정해진 절차였고, 혹시 모를 오작동을 예방하는 것은 무녀로서의 책임이기도 했다. 루아는 자신의 몸 안에 분신을 앉힌 채, 이슬이 변신한 옷을 입은 별이의 운전으로 정비소로 향했다. 정비소는 평범한 곳이었다. 기름 냄새와 기계 소음, 그리고 알 수 없는 부품들이 널려 있는, 신사의 고요함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어서 오세요! 정기 점검이시죠?”
정비사는 친절하게 인사하며 루아의 몸을 꼼꼼히 살폈다. 별이는 차에서 내렸고, 루아는 자신의 몸을 온전히 정비사의 손길에 맡겨야 했다.
가장 먼저 엔진룸이 열렸다. 후드가 위로 들리자, 루아는 마치 자신의 심장이 드러나는 듯한 기묘한 감각에 휩싸였다. 정비사의 손전등 불빛이 그녀의 내부 회로와 배터리 모듈 구석구석을 비췄다. 루아는 자신의 몸 안을 헤집는 그 빛을 온몸으로 느꼈다. 덮개로 가려져 있던 전선 다발, 냉각수 파이프, 그리고 복잡하게 얽힌 센서들이 낱낱이 노출되는 감각이었다. 정비사가 손으로 전선을 만지고, 볼트를 조이는 작은 진동 하나하나가 루아에게는 피부를 건드리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배터리 셀 전압은 양호하고요, 냉각수도 이상 없네요.”
정비사의 중얼거림이 루아의 몸, 즉 자동차의 구석구석을 통해 직접적으로 전달되었다. 마치 자신의 혈액 순환 상태를 누군가에게 브리핑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다음은 하부 점검이었다. 루아는 리프트 위로 올라갔고, 그녀의 몸은 공중에 붕 떠올랐다. 정비사는 바퀴 아래로 기어 들어가 하부를 살피기 시작했다. 서스펜션을 두드리는 둔탁한 소리, 브레이크 패드의 마모도를 확인하기 위해 손가락으로 문지르는 감촉, 구동축을 흔들어 유격을 확인하는 미세한 떨림까지, 모든 것이 루아의 감각을 통해 직접적으로 느껴졌다. 자신의 몸 아래쪽이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가장 민감했던 순간은 진단 장치를 연결했을 때였다. 정비사는 루아의 충전 포트에 케이블을 연결하고 노트북으로 수많은 데이터를 확인했다. 루아는 자신의 신경망이라 할 수 있는 통신 회로를 통해 정비사의 장치와 직접 연결되는 감각을 받았다. 그녀의 모든 전자 신호와 센서 정보가 여과 없이 외부로 흘러나가는 듯한, 묘하게 간지러우면서도 노출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상 없네요! 아주 깨끗합니다. 주기적으로 관리 잘 하신 것 같아요!”
정비사의 말이 끝나자, 루아는 다시 리프트에서 내려와 땅에 닿았다. 그녀의 몸을 낱낱이 조사하던 외부의 손길이 사라지자 비로소 안도감이 찾아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자신의 가장 깊은 곳까지 타인에게 보여진다는 경험은 루아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동시에 자신의 변신 능력으로 만들어진 몸이 얼마나 정교하고 완벽한지 다시 한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별이는 검사를 마친 루아의 몸에 올라탔고, 루아는 정비소를 떠나 신사의 고요한 품으로 돌아갔다. 몸 안쪽까지 낱낱이 들여다보이던 경험은 낯설었지만, 이 또한 세상의 이치를 알아가는 과정이라 생각하며 루아는 다음 변신을 위한 준비를 했다.[4:1]
샘이는 이제 자신의 작은 몸이 가진 특별함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꼬마 아가씨의 모습으로 영원히 살아간다는 사실이 때로는 작은 미련을 남겼지만, 그만큼 더 섬세하고 정교한 변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사 생활 10년, 샘이는 작은 몸을 이용해 누구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신사에 기여하기 시작했다.
신사 본당의 마루는 넓고, 낡은 목재 틈새 사이로 미세한 먼지가 쌓이곤 했다. 무녀들이 직접 청소하기에는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일이었다. 어느 날, 샘이는 이 광경을 보고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제가 청소해 드릴게요!”
샘이는 말과 함께 몸을 빛내며 변신했다. 그녀의 작은 몸은 둥글고 납작한 형태의 로봇 청소기가 되었다. 본체에는 작은 브러시가 달려 있었고, 흡입구에서는 미세한 바람 소리가 났다. 샘이는 신사 마루 위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능숙하게 먼지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몸 안의 센서로 구석진 곳이나 가구 밑까지 정확히 파고들어 청소했고, 마루 틈새의 미세한 먼지까지 놓치지 않았다.
“와, 샘이 덕분에 마루가 반짝반짝해졌네!”
루아는 로봇 청소기로 변신한 샘이가 지나간 자리를 보며 감탄했다. 샘이는 청소를 마친 뒤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기분 좋게 웃었다. “어때요? 작은 몸이라 구석구석 다닐 수 있어요!” 그녀의 활약 덕분에 신사 마루는 항상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한편으로 신사는 오래된 곳이라 무녀들이 사용하는 작고 소중한 물건들이 종종 사라지곤 했다. 특히 잃어버리기 쉬운 작은 장신구나 바늘 같은 것들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을 때가 많았다.
한번은 별이가 아끼던 머리 장식의 작은 보석이 떨어져 사라졌다. 모두가 애타게 찾았지만, 좀처럼 발견되지 않았다. 그때 샘이가 나섰다.
“제가 찾아볼게요!”
샘이는 자신의 몸을 고배율 돋보기로 변신시켰다. 그녀의 몸은 손잡이가 달린 투명한 유리 렌즈가 되었고, 그녀의 시야는 수십 배 확대되었다. 샘이는 돋보기의 형태로 바닥의 미세한 틈새와 먼지 속을 샅샅이 훑었다. 일반적인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아주 작은 조각들을 찾아내기 위함이었다.
마루의 아주 작은 틈새를 확대해서 보던 샘이는 이내 희미하게 반짝이는 것을 발견했다.
“여기 있어요! 언니 머리 장식 보석!”
샘이가 외치자, 무녀들은 놀라 샘이에게 다가왔다. 샘이가 가리킨 곳에는 정말 작게 떨어져 나간 보석이 먼지 속에 파묻혀 있었다. 샘이의 활약 덕분에 잃어버렸던 소중한 물건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신사의 물건들은 대부분 오래되었기 때문에 작은 수리가 필요한 경우가 잦았다. 특히 섬세한 시계나 복잡한 잠금장치처럼 작은 나사를 조여야 하는 일은 무녀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명아가 고장 난 괘종시계를 수리하던 중이었다. 작은 나사가 너무 깊숙이 박혀 있어 일반 드라이버로는 손댈 수 없었다. 그때 샘이가 다가왔다.
“명아님, 제가 도와드릴까요?”
샘이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몸을 정밀 드라이버로 변신시켰다. 그녀의 작은 몸은 얇고 날카로운 드라이버 날이 되었고, 손잡이 부분은 정교하게 회전할 수 있는 형태로 바뀌었다. 샘이는 명아의 손에 들려 마치 도구처럼 움직였다. 그녀는 자신의 몸으로 가장 작은 나사 홈을 찾아 정확하게 맞춰지고, 섬세하게 회전하며 삐걱거리던 나사를 완벽하게 조여냈다.
“놀랍군, 샘아! 너 덕분에 수리가 훨씬 쉬워졌어.”
명아는 샘이의 정교한 변신 능력에 감탄했다. 샘이는 작은 몸으로도 신사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영원한 꼬마 아가씨의 모습으로, 신사의 곳곳에서 작은 손길이 필요한 모든 곳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무녀가 되었다.[4:2]
신사의 가장 깊은 곳, 큰 무녀님의 거처는 늘 신비로운 기운으로 가득했다. 루아와 이슬, 그리고 별과 샘은 큰 무녀님 앞에 앉아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오늘은 큰 무녀님이 당신이 처음 무녀가 되었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날이었다. 그녀의 분신은 눈을 감고 아득히 먼 옛날을 회상하는 듯했다.
“나의 이야기는 너희가 아는 세상과는 많이 다를 게다. 아득한 옛날, 신화의 시대라고 불리던 시절의 이야기니 말이다.”
큰 무녀님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그 속에는 수천 년의 세월이 담겨 있는 듯 웅장했다.
“그때 세상은 지금처럼 정돈되지 않았어. 하늘과 땅의 경계가 모호했고, 인간과 신, 그리고 다른 모든 존재들이 뒤섞여 살아가던 혼돈의 시대였지. 나는 그때 평범한 인간 아이였단다. 다만 다른 아이들과는 조금 달랐어. 나는 세상의 소리, 바람의 속삭임, 흙의 진동까지도 남들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지.”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아련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어느 날, 세상에 큰 재앙이 닥쳤어. 하늘에서는 끊임없이 비가 쏟아져 땅을 집어삼키려 했고, 땅에서는 모든 것을 갈라놓을 듯한 진동이 멈추지 않았지.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고, 신들은 서로의 힘을 겨루며 혼란을 더욱 부추겼어. 나는 그 모든 혼돈 속에서, 세상이 파멸로 치닫는 것을 보며 깊은 슬픔에 잠겼단다.”
“나는 필사적으로 기도했어. 이 혼돈을 멈춰달라고, 세상의 모든 생명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나의 기도는 밤낮으로 이어졌고, 나의 간절함은 하늘에 닿았던 모양인지, 어느 순간 거대한 빛줄기가 나에게 쏟아져 내렸어.”
큰 무녀님의 얼굴에 당시의 경외감이 스쳤다.
“그 빛 속에서, 나는 세상의 모든 지식과 만물의 이치를 깨달았지. 나의 육신은 빛과 함께 재구성되었고, 세상의 근원적인 힘과 연결되는 것을 느꼈단다. 더 이상 추위도, 배고픔도, 죽음의 두려움도 느낄 수 없는 존재가 되었어. 그리고 그때, 내 안에서 강력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지.”
큰 무녀님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너는 세상의 균형을 지킬 자. 너의 몸은 이 세상과 신들을 잇는 다리가 될 것이며, 너의 존재는 영원히 이 땅을 수호할 것이다.’ 그 목소리는 나에게 경계를 만들 수 있는 힘을 주었고, 그 경계 안에서 물질의 한계를 뛰어넘는 능력을 부여했지. 나는 신의 뜻을 받아들여, 이 산속에 첫 신사를 세웠단다.”
그녀는 고요히 눈을 떴다.
“그렇게 나는 신사의 첫 무녀가 되었고, 내 몸의 일부는 이 신사의 건물이 되었단다. 내가 건물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분신을 만들어 너희를 만나는 것도, 신화 시대에 나와 같은 존재가 신사 그 자체가 되어 세상과 연결됨으로써 혼란을 막기 위함이었지. 나의 존재 자체가 신과 인간, 그리고 세상의 조화를 지키기 위한 증거가 된 셈이니까.”
큰 무녀님의 이야기에 무녀들은 숨을 죽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신사의 근원이 이토록 웅장하고 신비로운 신화 시대의 시작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달았다. 큰 무녀님의 존재는 단순한 무녀가 아닌, 살아있는 역사이자 신의 뜻을 잇는 영원한 존재였다.[4:3]
루아는 큰 무녀님의 서한을 품에 안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번 목적지는 물질의 한계를 뛰어넘는 자신들의 신사와는 또 다른 의미로 신비로운 곳이었다. 바로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신사,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인식하며 시간을 초월한 존재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큰 무녀님은 언젠가 그곳의 무녀들은 ‘모든 시간이 한 조각의 풍경화처럼 펼쳐져 있는’ 것을 본다고 설명한 적이 있었다.
이슬이 변신한 옷을 입고, 루아가 변신한 전기자동차의 운전석에는 별이가 앉아 있었다. 샘이는 조수석에 앉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창밖 풍경을 스쳐 보았다. 이번 방문은 단순한 교류를 넘어, 신사 간의 중요한 의례였다.
시간의 신사는 깊은 산속, 안개에 잠긴 호수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신사 입구에 다다르자, 루아의 몸, 즉 자동차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시간이 팽창하고 수축하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온몸을 휘감았다. 루아의 분신은 심호흡을 하고 차에서 내렸다.
신사 문이 열리고, 한 무리의 무녀들이 그들을 맞이했다. 그들의 눈빛은 깊고 아득했다.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예지가 한데 섞여 있는 듯한 오묘한 시선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사처럼 영원히 늙지 않았지만, 그들의 존재 자체가 시간의 흐름을 초월해 있었다.
루아는 큰 무녀님의 서한을 건넸다. 서한을 받은 무녀는 봉투를 열기도 전에 이미 내용을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환영합니다. 물질의 경계를 수호하는 이들이여. 큰 무녀님의 안부는 이미 전달받았습니다.”
무녀의 말에 루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정말 모든 시간을 동시에 인식하고 있는 듯했다.
루아와 별이, 샘이는 신사 내부로 안내되었다. 그들의 신사는 건물이 큰 무녀님의 몸이었지만, 이곳의 건물들은 마치 시간의 흐름이 정지된 듯한 고요함을 품고 있었다. 복도에는 과거의 그림자와 미래의 잔상이 흐릿하게 겹쳐 보이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들은 이 신사의 최고 무녀인 ’시간의 수호자’와 마주했다. 시간의 수호자는 늙지도, 젊지도 않은 중성적인 얼굴로 그들을 맞이했다.
“그대들이 알고자 하는 것은 미래겠지. 하지만 시간의 흐름은 함부로 바꿀 수 없는 것이며, 모든 것을 알리는 것은 오히려 혼란을 초래한다.”
시간의 수호자는 나직하게 말했다.
“우리는 미래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으나, 필요한 때에, 필요한 만큼만을 전달할 수 있다. 그대들이 지닌 신사의 비밀처럼, 우리의 예지 또한 철저히 보호되어야 할 신의 뜻이기 때문이지.”
루아는 망설임 끝에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혹시… 저희 신사에 닥쳐올 미래의 큰 위험은 없습니까?”
시간의 수호자는 잠시 침묵했다. 그녀의 눈빛이 아득한 시간의 저편을 응시하는 듯했다. 그리고 짧게 답했다.
“큰 혼란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너희 신사의 능력이 시험받을 때가 올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인지는 알릴 수 없다. 다만, 너희가 준비할 시간은 충분하다.”
명확하지만 제한적인 답변이었다. 루아는 아쉬웠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의 신사가 비밀 유지를 위해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듯, 이곳 역시 시간의 흐름을 보호하기 위한 철칙이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아는 희망을 얻었다. 다가올 위험을 막을 수는 없더라도, 그것을 대비할 시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다. 루아는 큰 무녀님의 서한에 대한 답신을 받은 뒤, 시간의 신사를 떠나 자신들의 신사로 돌아왔다. 그들의 몸은 물질의 한계를 뛰어넘지만, 이제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다가올 미래를 인지하고 준비해야 하는 새로운 숙제를 안게 되었다.[4:4]
시간의 신사는 그 이름처럼 시간의 제약을 초월한 곳이었다. 이곳의 무녀들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인식하며 살았다. 그들의 일상은 겉보기에는 고요했지만, 시공간의 모든 순간이 한데 얽혀 흐르는 독특한 양상을 띠었다.
시간의 신사 무녀 중 하나인 새롬은 젊은 모습의 무녀였지만, 그녀의 눈빛은 먼 미래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어느 날, 새롬은 신사 정원에서 약초를 다듬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눈앞에 흐릿하게 미래의 장면이 스쳤다. 자신이 약초를 너무 많이 말려 효능이 떨어진 채 보관하는 모습이었다.
“앗, 내일은 약초를 서늘한 곳에 둬야겠네.”
새롬은 중얼거렸다. 옆에서 지켜보던 노련한 무녀 예진은 미소 지었다.
“벌써 내일의 실수를 피하고 있구나. 과거에 같은 실수를 반복했던 나로서는 부러울 따름이로군.”
예진은 새롬의 미래를 보지 못했지만, 새롬의 반응을 통해 그녀가 미래를 인지했음을 알 수 있었다. 시간의 무녀들은 이런 식으로 서로의 예지를 직접적으로 공유하지는 않아도, 일상의 소소한 행동을 통해 간접적으로 미래의 흐름을 읽고 대처하곤 했다. 어제의 실수를 통해 배우고, 내일의 지혜를 오늘 활용하는 것이 그들의 일상이었다.
신사의 주방에서는 매일 특이한 대화가 오갔다. 주방을 담당하는 무녀 솔은 언제나 신선한 재료로 요리를 했지만, 그녀의 요리 계획은 현재의 필요만이 아니었다.
“음… 3일 뒤에 올 손님들이 육류를 선호하는군. 미리 양념에 재워둬야겠어.”
솔은 투명한 칼날로 고기를 다듬으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녀는 아직 신사에 초청받지도 않은, 혹은 아직 그 초청이 확정되지도 않은 미래의 손님들을 위해 요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루아 일행이 시간의 신사를 방문하기 며칠 전에도, 솔은 이미 그들의 방문과 선호하는 차 종류를 미리 파악하고 준비를 해두었다.
“솔님, 혹시 오늘 저녁 식사에는 생선 요리도 나오나요? 미래의 제가 생선찜을 아주 맛있게 먹는 장면이 보이네요!”
호기심 많은 어린 무녀 지혜가 주방으로 달려와 물었다. 솔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너의 미래의 기억이 그렇게 말해준다면 당연히 준비해야지.”
가끔은 외부 세계와의 소통도 있었다. 먼 미래에서 온 편지를 현재에 배달하거나, 혹은 과거로 보내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는 극히 드문 경우였고, 반드시 필요한 때에만 이루어졌다.
어느 날, 시간의 신사 가장 깊은 곳, 시간에 대한 지식을 기록하는 무녀 율은 오래된 두루마리를 펼치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흐릿한 글자들이 보였다. 수백 년 뒤, 세상에 큰 재앙이 닥쳤을 때, 어떤 학자가 기록한 간절한 메시지였다.
“이 편지는 300년 전의 인류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특정 식물의 씨앗이 필요하다는 내용이군. 그리고 발신인은… 미래의 신사 무녀들이었군.”
율은 고요히 일어섰다. 그녀는 편지의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을 전달할 가장 적절한 시간을 찾아냈다. 과거를 바꾸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발생한 미래의 필요에 따라, 과거에 해야 할 일을 인지하고 실행하는 것뿐이었다.
시간의 신사 무녀들은 이처럼 과거, 현재, 미래가 뒤섞인 일상을 살아가며 시간의 흐름을 조화롭게 유지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들의 존재는 세상의 시간적 균형을 지키는, 보이지 않는 수호자들이었다.[4:5]
시간의 신사에서 돌아온 루아와 별이, 샘이는 큰 무녀님의 거처로 향했다. 이슬은 다시 루아의 옷으로 변신했고, 샘이는 별이의 손을 잡고 조용히 뒤를 따랐다. 큰 무녀님은 그들이 돌아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따뜻한 차를 준비해두고 기다리고 계셨다.
“잘 돌아왔구나. 시간의 신사는 어떠했느냐?”
큰 무녀님의 질문에 루아는 차분히 답했다.
“놀라웠습니다, 큰 무녀님. 그곳의 무녀들은 정말 모든 시간을 동시에 인식하는 듯했습니다. 저희가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제한적으로만 해주셨습니다.”
루아의 말에 큰 무녀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시간의 신사가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비밀이자 원칙이란다. 너희 신사가 물질의 경계를 넘나드는 능력을 가졌듯, 그들은 시간의 흐름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 너무 많은 미래를 알리는 것은 시간의 질서를 해치고 혼돈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지.”
큰 무녀님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설명을 이어갔다.
“시간의 무녀들은 너희처럼 특정한 형태로 변신하지 않는다. 그들 자체가 시간의 파동과 동화되어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지. 그들은 모든 ’순간’에 존재한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감각, 그리고 미래의 예지가 그들의 의식 속에서 끊임없이 교차하며 흐른단다.”
별이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럼… 그분들은 저희처럼 특정 사물을 만드실 수는 없는 건가요?”
“그렇다. 그들은 물질을 다루는 능력은 가지고 있지 않아. 대신 그들의 몸은 시간의 흔적을 그대로 담고 있지. 가령, 갓 태어난 아기의 모습으로 수백 년 전의 지식을 말하거나, 노인의 모습으로 다음 순간 벌어질 일을 정확히 예지하기도 한단다. 그들의 육신은 시간의 흐름을 반영하는 그릇과도 같지.”
샘이가 신기한 듯 눈을 반짝였다. “그럼 그분들은 저희가 지금 뭘 생각하는지도 다 아세요?”
큰 무녀님은 샘이를 보며 빙긋 웃었다. “정확히는 너희의 ’생각’을 아는 것이 아니라, 너희의 생각이 불러올 ’미래의 결과’를 먼저 본다고 이해하면 쉬울 게다. 그들에게는 모든 인과 관계가 이미 확정된 하나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으니 말이다.”
“너희 현신의 무녀와 시간의 무녀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신의 뜻을 받들고 있단다. 너희는 세상의 물질적 균형과 현실 세계의 필요를 채우는 존재들이고, 그들은 시간의 질서와 역사의 흐름을 지키는 존재들이지. 서로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궁극적인 목표는 같다. 바로 이 세상의 조화를 유지하고, 신의 뜻을 지키는 것이다.”
큰 무녀님은 따뜻한 시선으로 루아와 별이, 샘이를 바라보았다.
“너희가 이번 방문을 통해 시간의 신사에 대한 이해를 높인 것처럼, 언젠가 그들도 너희 신사의 능력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다가올 혼란의 시기에는 너희 두 신사의 힘이 합쳐져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단다.”
루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의 신사 방문은 그녀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안겨주었다. 자신의 능력이 단순히 편리함을 넘어 세상의 균형을 지키는 중요한 역할임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다가올 ’큰 혼란의 시기’에 대한 막연한 예감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신사와 다른 무녀들의 존재를 더욱 소중하게 느끼게 되었다.[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