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에 다시 겨울이 찾아들고 있었다. 루아는 난로로 변신한 하연 곁에 앉아 타닥거리는 장작 소리를 듣고 있었다. 평화로운 시간이었지만, 문득 알 수 없는 진동이 신사 전체를 감쌌다. 그것은 지진처럼 물리적인 흔들림이 아니라, 영적인 파동에 가까웠다. 루아뿐만 아니라 다른 무녀들도 동시에 그 미묘한 기척을 감지한 듯 서로를 돌아보았다.
“큰 무녀님…”
루아의 텔레파시가 큰 무녀님께 닿았다. 큰 무녀님의 분신은 조용히 눈을 감고 기운의 흐름을 읽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새로운 아이가 우리에게 오고 있구나.”
큰 무녀님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신사 전체에 울려 퍼지는 듯했다. 무녀들의 얼굴에는 기대와 설렘이 떠올랐다. 신사에 새로운 무녀가 온다는 것은 언제나 큰 기쁨이자, 신의 축복이 이어지고 있음을 의미했다.
새로운 무녀가 온다는 소식에 신사에는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무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명아는 늘 그랬듯이 신사 주변의 경계 감지 시스템을 꼼꼼히 점검했다. 그녀는 경계의 미세한 흐름 하나까지 놓치지 않으려 했고, 혹시라도 외부의 불순한 기운이 감지되면 즉시 알릴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그녀의 섬세한 손길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신사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었다.
지수는 도서관의 서적들을 다시 한번 정리하고 먼지를 털어냈다. 새로 올 무녀가 신사의 역사와 지식을 습득해야 할 테니, 필요한 책들을 찾기 쉽게 분류하고 배치하는 데 집중했다. 그녀는 책장이자 지식의 수호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이슬은 새로운 무녀가 머물게 될 거처를 깨끗하게 정돈했다. 포근한 이불을 새로 깔고, 따뜻한 물을 미리 데워 두었다. 그녀는 섬세한 손길로 방석을 다듬고, 작은 꽃을 꽂아 넣어 포근하고 환영받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루아는 이슬 곁에서 그녀가 펼쳐놓은 천을 붙잡아주며 거들었다.
루아 역시 자신의 첫 방문을 떠올리며 새로운 무녀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녀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자신의 몸을 구급상자로 변신시켜 필요한 의료 도구와 약품들을 갖춰 놓았다. 또한, 긴 여행에 지쳤을 새 무녀를 위해 따뜻한 차를 끓일 수 있는 포트로 변신할 준비도 마쳤다. 그녀는 설렘 반, 걱정 반으로 새로운 만남을 기다렸다.
며칠 후, 신사로 향하는 산길에는 눈이 더욱 깊게 쌓였다. 하지만 무녀들의 마음은 따뜻한 빛으로 가득했다. 그들은 신의 부름을 받은 새로운 영혼이 어둠 속을 헤치고 빛을 향해 다가오고 있음을 확신했다. 그리고 그 빛이 마침내 신사의 문을 열고 들어설 순간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3:1]
신사 주변의 눈이 더욱 깊게 쌓여가던 어느 날 오후, 경계를 감지하던 명아의 텔레파시가 무녀들에게 다급히 전해졌다.
“큰 무녀님! 새로운 기운이 감지되었습니다. 그런데… 두 명이에요!”
무녀들은 일제히 술렁였다. 신의 부름을 받은 자는 늘 홀로 신사를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두 명이라니, 전례 없는 일이었다. 큰 무녀님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이내 온화한 표정을 되찾았다.
“예상치 못한 손님이 찾아왔구나. 모두 준비하도록 하렴.”
무녀들은 신사 입구로 향했다. 그들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하얀 눈밭 위로 힘겹게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오는 두 개의 작은 형체였다. 한 명은 앳된 소녀였고, 그 뒤를 쫓아오는 다른 한 명은 훨씬 어린 소년이었다.
소년은 눈 속에 발이 빠지며 연신 넘어질 뻔했고, 소녀는 그런 동생을 기다리며 뒤를 돌아보곤 했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소녀의 눈빛만은 신사를 향한 강렬한 열망으로 빛나고 있었다. 바로 그녀가 신의 부름을 받은 새로운 무녀였다. 하지만 동생은 어쩌다 언니를 쫓아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
소녀와 소년이 신사 경계에 다다르자, 루아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소녀는 아무렇지 않게 경계를 넘어섰지만, 소년이 경계를 침범하는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크흑!”
소년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의 몸에서 마치 전기가 흐르는 듯한 푸른빛이 번쩍였고, 이내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눈은 공포에 질린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소년은 살아있는 인형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소녀는 놀라 동생에게 달려갔다. “지훈아! 왜 그래, 지훈아!” 그녀가 소년의 몸을 흔들었지만, 소년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소녀의 눈에도 절망과 혼란이 가득 찼다.
큰 무녀님은 차분하게 다가와 소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놀라지 마라, 아이야. 이 아이는 다치지 않았단다. 다만, 신의 경계는 선택받지 않은 자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곳. 그의 영혼을 보호하기 위해 잠시 시간을 멈춘 것뿐이야.”
큰 무녀님은 소년을 한 번 바라본 후, 무녀들에게 지시했다.
“소년을 조용히 신사 밖으로 옮겨두고, 그가 안전하게 깨어날 수 있도록 보호막을 쳐 주렴. 그리고 이 소녀를 안으로 인도하라.”
무녀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하연은 소년의 몸을 따뜻하게 감싸는 담요로 변신했고, 이슬은 소년의 주변에 투명한 보호막으로 변해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그를 감쌌다. 루아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구급상자로 변신한 채 그들을 따랐다.
소녀는 불안한 눈빛으로 동생이 옮겨지는 모습을 지켜보았지만, 큰 무녀님의 부드러운 손길과 무녀들의 침착한 움직임에 이끌려 신사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눈빛에는 여전히 동생에 대한 걱정과 함께, 자신이 마주하게 될 새로운 운명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가 뒤섞여 있었다. 신성한 공간에서 펼쳐진 예상치 못한 사건은 새로운 무녀의 이야기에 거대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3:2]
신사의 본당, 따뜻한 온기가 감도는 방에서 큰 무녀님과 다른 무녀들이 소녀를 둘러싸고 앉았다. 소녀의 이름은 수아였다. 수아는 아직 눈물을 닦아내지 못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 이름은 수아예요. 갑자기 제 머릿속에서 ’신사로 오라’는 목소리가 들렸어요. 처음에는 제가 미쳤나 했지만… 목소리는 계속 저를 불렀어요.”
수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의 눈빛은 신의 부름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삶의 무게를 담고 있었다.
“저희 부모님은… 돌아가셨어요. 몇 년 전에 사고로요. 저에게는 동생 지훈이가 유일한 혈육이에요. 제가 없으면 지훈이는 정말 혼자 남게 돼요. 아무도 지훈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요….”
수아의 목소리는 흐느낌으로 변했다.
“그래서… 제가 신사로 오면 지훈이도 혼자 남겨질까 봐, 제가 떠나면 지훈이가 너무 외로워할까 봐… 제가 도망치듯 집을 나서는데, 지훈이가 제 뒤를 쫓아왔어요. 제가 아무리 돌아가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고… 결국 여기까지 함께 오게 된 거예요.”
수아는 고개를 숙였다.
“저는… 신께서 저를 부르셨으니 무녀가 될 수 있어요. 하지만 지훈이는요? 제가 무녀가 되면 지훈이는 어떻게 되는 거죠? 저는… 지훈이를 혼자 두고 갈 수 없어요.”
그녀의 눈물은 멈출 줄 몰랐다.
수아의 이야기는 신사의 무녀들을 깊은 침묵에 빠뜨렸다. 큰 무녀님의 분신조차 평온했던 얼굴에 깊은 고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신사의 철칙은 분명했다. 일반인은 신사 경내에 들어올 수 없었다. 경계는 무녀 외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일반인이 들어올 경우 지훈이처럼 움직임을 멈추게 하는 가혹한 제재가 따랐다. 신사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한 절대적인 규칙이었다.
하지만 수아의 사연은 그 규칙을 흔들 만큼 절박했다. 부모를 잃고 유일한 혈육인 동생을 위해 신의 부름마저 거부하려는 소녀의 순수한 마음에 무녀들은 쉽게 답을 내릴 수 없었다.
큰 무녀님은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신님께서는 어찌하여 이토록 가혹한 상황에 처한 아이를 무녀로 삼으려 하시는가?’ 그녀의 내면에서는 오랜 세월 신사를 지켜온 원칙과, 한 소녀의 절절한 슬픔 사이에서 번민이 일었다. 신의 뜻은 언제나 오묘했지만, 이번만큼은 그 의미를 헤아리기가 쉽지 않았다. 다른 무녀들도 마찬가지였다. 명아는 이성적으로 해결책을 찾으려 애썼지만 마땅한 답을 찾지 못했고, 이슬과 루아는 수아의 슬픔에 깊이 공감하며 안타까워했다. 신성한 공간을 지키는 무녀로서의 사명과, 인간적인 연민 사이에서 모두가 딜레마에 빠진 상황이었다.[3:3]
신사 안, 큰 무녀님의 고뇌는 깊어졌다. 그때, 그녀의 눈이 번뜩 뜨였다. 그녀는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루아와 이슬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루아는 여전히 구급상자로 변신한 채였고, 이슬은 그녀를 감싸는 보호막이었다.
“루아, 이슬. 내 말을 지훈에게 전해주렴. 그 아이에게 무녀가 될 용의가 있는지 물어보거라.”
루아와 이슬은 놀랐지만, 큰 무녀님의 뜻을 따랐다. 루아는 이슬에게 텔레파시로 말했다. “이슬님, 제가 지훈에게 말을 걸게요. 이슬님은 저의 옷이 되어주세요.”
이슬은 고개를 끄덕이며 루아의 몸을 감싸는 단정한 무녀복으로 변신했다. 루아는 인간의 모습으로 지훈의 곁에 섰다. 아직도 얼어붙은 채 눈만 깜빡이는 지훈에게 루아는 조심스럽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지훈아, 내 목소리가 들리니? 나는 이 신사의 무녀 루아야. 큰 무녀님께서 너에게 물으신다. 너는 무녀가 될 용의가 있느냐고.”
지훈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의 머릿속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녀…요? 제가… 남자인데… 남자도 무녀가 될 수 있나요?”
루아는 큰 무녀님의 뜻을 전달했다.
“남자로서 무녀가 된다는 것은… 너의 남성을 버린다는 뜻이다. 너의 모든 존재가 신께 바쳐져, 새로운 형태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지. 더 이상 남자로서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는 뜻이야.”
지훈의 눈에 순간적인 망설임이 스쳤다. 그러나 곧 그의 시선이 신사 안쪽, 누나가 사라진 방향을 향했다. 누나의 슬픔과 외로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지훈이었다. 그가 홀로 남겨지는 것을 상상하자, 어떤 대가라도 치를 수 있다는 결심이 그의 작은 마음에 차올랐다.
“누나와… 함께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러겠어요.”
지훈의 마음이 확고해지는 순간이었다.
지훈의 대답이 루아를 통해 큰 무녀님께 전달되자, 신사 전체에 신비로운 빛이 감돌았다. 지훈의 몸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체격은 미세하게 작아지고, 어깨선은 부드러워졌다. 앳된 소년의 얼굴은 점차 섬세한 곡선을 띠었고, 짧았던 머리카락은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형태로 변해갔다.
루아와 이슬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기적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훈의 몸은 이제 누가 보아도 어린 여자아이의 모습이었다. 비록 아직은 소년의 흔적이 남아 있는 듯했지만, 그는 분명히 새로운 무녀로 다시 태어난 것이었다.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경계의 제약도 사라진 듯, 그는 이제 자유롭게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루아는 감격에 찬 텔레파시를 큰 무녀님께 보냈다. “큰 무녀님! 이… 이런 기적이…!” 이슬 또한 경외심 가득한 시선으로 큰 무녀님을 바라보았다.
큰 무녀님은 온화하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나는 그저 신님의 생각을 헤아렸을 뿐이란다. 신께서는 이 아이의 순수한 마음과 누나에 대한 깊은 사랑을 보시고, 새로운 길을 열어주신 것이지.”
큰 무녀님은 이제 소녀가 된 지훈과 수아를 향해 따뜻한 시선을 보냈다.
“수아, 너는 이제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존재가 되거라. 너의 새 이름은 별이다.”
그리고 지훈을 바라보았다.
“너는 이제 땅의 샘물처럼 맑고 순수한 존재가 되거라. 너의 새 이름은 샘이다.”
별과 샘, 두 자매 무녀는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그들의 눈빛에는 혼란과 두려움 대신,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과 서로에 대한 굳건한 사랑이 가득했다. 신사의 문턱을 넘어선 그들은 이제 영원불멸의 존재로서, 신의 뜻을 받들고 서로를 의지하며 새로운 길을 걷게 될 것이었다.[3:4]
신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것은 단연 샘이였다. 본래 소년이었던 터라, 어린 소녀의 몸으로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샘이는 여전히 장난기 넘치고 호기심 많은 성격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다. 신사의 고요하고 정갈한 분위기 속에서 샘이의 천방지축 행동들은 때때로 작은 소동을 일으키곤 했다.
샘이의 첫 번째 장난은 다름 아닌 명아였다. 명아가 피아노로 변신해 루아와 함께 연주 연습을 하던 중이었다. 샘이는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피아노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다 루아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샘이는 명아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명아님, 혹시 제가 건반을 마구 눌러도 소리가 안 나게 할 수 있어요?”
명아는 난처해하면서도 샘이의 순수한 호기심에 결국 허락했다. “음… 아주 잠깐이라면.”
그 순간, 샘이는 피아노 건반 위로 뛰어올라 발로 마구잡이로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다. 쿵! 쿵쾅! 타다닥! 피아노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샘이는 소리 없는 피아노 위에서 껑충껑충 뛰며 신이 나 방방 뛰었다. 루아가 돌아와 그 광경을 보고 황당해하자, 명아는 “잠시 음소거 모드를 활성화했습니다”라고 대답하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슬을 포함한 몇몇 무녀들은 그 모습을 보고는 조용히 웃음을 터뜨렸다.
어느 날, 샘이는 도서관에서 책장으로 변신해 있는 지수에게 다가가 장난스럽게 말을 걸었다.
“지수님, 저랑 숨바꼭질할래요? 제가 못 찾게 숨어보세요!”
지수는 평소처럼 차분했지만, 샘이의 제안에 피식 웃었다. “음, 어디 한번 찾아보렴.”
샘이는 신나게 도서관 안을 뛰어다니며 지수를 찾기 시작했다. 지수는 자신의 몸을 주변 책장과 완벽하게 동화시키며 능숙하게 숨었다. 샘이는 아무리 찾아도 지수를 발견할 수 없자 점점 더 흥분했다. 그러다 우연히 손을 짚은 낡은 책장 사이에서 희미한 틈을 발견했다. 그 틈으로 손을 집어넣자, 손끝에 차가운 금속 감촉이 느껴졌다.
“찾았다!”
샘이가 외치자, 지수는 다시 본래의 책장 모습으로 돌아왔다. 샘이가 손을 넣었던 틈을 살펴보니, 그곳에는 아주 작고 오래된 나침반 하나가 숨겨져 있었다. 나침반은 신사의 무녀들이 오래전부터 외부 활동 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사용하던 유물이었는데, 그 존재조차 잊힌 지 오래였다.
지수는 샘이가 찾아낸 나침반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런, 이걸 아직도 가지고 있었구나. 네 덕분에 잊고 있던 중요한 물건을 다시 찾게 되었네.” 샘이의 천진난만한 장난 덕분에 신사의 숨겨진 유물이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겨울이 다시 찾아오자, 샘이는 에어프라이어로 변신한 채은 곁을 떠나지 않았다. 맛있는 군고구마와 통닭이 쉴 새 없이 나오자, 샘이는 채은의 ‘출력구’ 앞에서 진을 치고 앉았다. 한 번은 채은이 막 구워낸 뜨거운 통닭을 꺼내려는데, 샘이가 참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통닭을 쿡 찔렀다.
“앗! 뜨거워!”
샘이는 놀라서 손을 떼었지만, 통닭은 그만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채은은 텔레파시로 “샘아, 조심해야지!”라며 한숨 쉬었고, 다른 무녀들은 샘이의 귀여운 사고에 폭소를 터뜨렸다. 물론 채은은 떨어진 통닭을 다시 흡수하여 금세 새 것으로 만들어냈지만, 샘이의 천진난만한 식탐은 주방의 작은 소동으로 이어지곤 했다.
샘이의 신사 생활은 이처럼 작은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의 순수하고 활기찬 모습은 무녀들의 삶에 새로운 웃음과 활력을 더해주었다.[3:5]
무녀 수업 시간, 별이는 큰 무녀님 앞에서 신사의 역사와 무녀의 삶에 대해 배우고 있었다. 큰 무녀님이 “무녀가 되는 순간, 너희의 시간은 멈춘다”고 설명했을 때였다. 별이의 머릿속에 섬광처럼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큰 무녀님… 그럼… 샘이는 이 모습 그대로 영원히 살게 되는 건가요?”
별이의 목소리에는 당황스러움과 함께 어린 동생에 대한 애틋함이 묻어났다. 지금의 샘이는 여전히 앳된, 작은 소녀의 모습이었다. 이 모습으로 영겁의 시간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별이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큰 무녀님은 별이의 질문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단다, 별아. 무녀가 된 시점에서 육체의 성장은 멈추게 되지. 샘이 역시 지금의 모습 그대로 영원히 살아가게 될 것이야.”
별이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녀는 동생이 영원히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남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듯했다.
큰 무녀님은 별이의 마음을 읽었는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별아, 너무 염려하지 마렴. 작은 몸이기에 얻는 이점도 분명히 있단다.”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샘이의 작은 체구가 가진 잠재력을 설명했다.
“세상에는 작기 때문에 더욱 유용하게 변신할 수 있는 물건들이 많이 있단다. 큰 몸으로는 불가능한 정교하고 섬세한 형태들 말이지. 예를 들어, 루아가 변신하는 전기자동차의 작은 부품이 될 수도 있고, 명아가 변신하는 전자 기기의 미세한 회로가 될 수도 있겠지.”
큰 무녀님은 시선을 멀리, 신사 마당에 뛰어노는 샘이를 향했다. 샘이는 여전히 천방지축으로 뛰어놀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신님께서 샘이를 이 모습 그대로 무녀로 삼으신 진정한 의중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단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깊은 통찰이 담겨 있었다.
“작은 존재로서 세상의 아주 미세하고 정교한 부분까지 깊이 이해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역할을 찾아내기를 바라시는 것일 수도 있지. 큰 힘을 지닌 존재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란다. 때로는 작고 섬세한 존재가 더욱 깊은 변화를 이끌어낼 수도 있는 법이니까.”
별이는 큰 무녀님의 설명을 들으며 샘이의 작은 몸이 가진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비록 영원히 성장하지 않을지라도, 샘이가 가진 잠재력은 결코 작지 않다는 큰 무녀님의 말에 별이의 마음속에 드리웠던 그늘은 점차 걷히기 시작했다.[3:6]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만약 무녀가 되지 않았다면 스물 안팎의 청년이 되었을 샘이는 여전히 앳된 꼬마 아가씨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키는 더 이상 자라지 않았고, 얼굴은 처음 신사에 왔을 때와 똑같이 천진난만했다. 하지만 샘이의 눈빛은 더 이상 어린아이의 것이 아니었다. 그 속에는 10년의 세월 동안 쌓인 지혜와 경험, 그리고 깊어진 감정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샘이는 가끔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작은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또래 친구들이라면 한창 성장하여 어른의 모습을 갖춰갈 시기였다. 문득, 자신도 그들처럼 키가 크고, 몸이 성숙해지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꼬맹이의 모습으로 영겁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아주 작은 미련이 남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미련은 오래가지 않았다. 샘이의 시선은 곧 신사 안을 뛰어다니는 별이에게로 향했다. 이제는 어엿한 무녀가 된 언니, 별이. 샘이는 자신이 이 작은 모습으로 남았기에 언니와 함께 신사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더 큰 기쁨을 느꼈다. 만약 자신이 성장하여 외부 세계로 나갔더라면, 언니와 이렇게 매일 함께할 수는 없었을 터였다. 샘이에게는 언니와 함께하는 이 영원한 시간이 무엇보다 소중했다.
어느 화창한 오후, 루아는 마당에서 생각에 잠겨 있는 샘이에게 다가갔다. 루아는 샘이의 고민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샘아, 무슨 생각해? 혹시 답답하면 내가 자동차로 변신할 테니 드라이브 한 번 할래?”
샘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정말요, 루아님? 좋아요! 드라이브 가요!”
샘이는 신이 나서 깡충깡충 뛰었다. 루아는 샘이의 활기찬 모습에 미소 지으며 전기자동차로 변신할 준비를 했다. 매끈한 차체와 번쩍이는 헤드라이트, 모든 것이 완벽하게 구현될 터였다.
루아가 막 변신을 시작하려던 찰나, 문득 중요한 사실이 머릿속을 스쳤다. 루아의 몸이 전기자동차로 완전히 변신하고, 운전석에 루아의 분신이 앉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샘이는 여전히 꼬마 아가씨의 몸이었다.
루아는 변신을 멈추고 샘이를 바라보았다. 샘이 역시 루아의 시선을 느끼고는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그녀의 눈에도 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간 듯했다.
“루아님… 저… 조수석에 앉으려면… 어린이용 시트가 필요하겠네요?”
샘이의 목소리에는 어이없다는 듯한 핀잔이 섞여 있었다. 루아는 자신의 완벽한 계획에 예상치 못한 허점이 있었음을 깨닫고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 그랬지! 내가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네!”
샘이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쯧쯧, 루아님도 참. 자동차로 변신할 생각만 하시고, 중요한 건 빼먹으시면 어떡해요!”
루아는 샘이의 핀잔에 멋쩍게 웃었다. 영원히 작은 모습으로 남을 샘이의 존재는 때로는 이런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만들어내곤 했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이 루아에게는 샘이와의 소중한 추억으로 쌓여가고 있었다.[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