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아는 이슬의 옷이 되어 겪었던 경험과 큰 무녀님의 설명을 통해 자신의 변신 능력에 대한 깊은 이해를 얻었다. 단순히 형태를 바꾸는 것을 넘어, 변신한 대상의 기능과 속성을 완벽히 이해하고 구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은 것이다. 그녀는 명아가 텔레비전이 되어 외부 정보를 얻고, 지수가 책장이 되어 지식을 보존하는 모습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
어느 날, 무녀들이 다른 신사를 방문하기 위해 나서는 모습을 본 루아는 문득 불편함을 느꼈다. 그들은 항상 걸어가거나, 때로는 마을까지 내려가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했다. 신사 간의 거리가 상당했기에 왕복에만 하루 이상이 소요되기도 했다.
‘우리가 직접 움직일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루아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생각이 스쳤다. 그리고 그녀는 결심했다. 무녀들의 이동을 돕기 위해, 전기자동차가 되기로. 그것도 단순히 움직이는 덩어리가 아니라, 완벽하게 기능하는 진짜 자동차가 되기로 말이다.
루아는 곧장 큰 무녀님의 분신을 찾아가 자신의 의지를 밝혔다. 큰 무녀님은 루아의 당찬 결심에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훌륭한 생각이구나, 루아. 너의 능력이 무녀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게다.”
다음 날부터 루아의 특별 훈련이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그녀에게 주어진 것은 다름 아닌 두꺼운 전기자동차 정비 매뉴얼이었다. 그것도 단순한 사용자 매뉴얼이 아니라, 전문가용 정비사 매뉴얼이었다.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매뉴얼은 복잡한 회로도와 부품 설명, 그리고 고장 진단 절차 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루아는 경계 안에서 매뉴얼을 펼쳐 들었다. 처음에는 눈앞의 글자들이 그저 복잡한 기호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명아나 지수처럼 완벽한 변신을 이루기 위해선 단순히 겉모습을 흉내 내는 것을 넘어, 내면의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매뉴얼의 모든 페이지를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배터리 모듈의 구성, 전력 제어 장치(PCU)의 역할, 모터의 구동 원리, 회생 제동 시스템, 심지어는 자율 주행을 위한 센서 배열과 데이터 처리 방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부 사항을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눈으로 읽는 것을 넘어, 마치 자신의 몸에 그 정보들이 각인되는 듯한 몰입감을 느꼈다. 때로는 매뉴얼 속 그림을 보며 자신의 신체를 해당 부품으로 변형시켜 보기도 했다. 작은 기어가 되거나, 복잡한 전선 다발이 되어 보는 식이었다.
루아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매뉴얼을 탐독했다. 매뉴얼의 페이지가 닳아 해질 정도로 읽고 또 읽었다. 그녀는 전기자동차의 모든 기술적인 요구사항과 작동 원리를 완전히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의 몸으로 구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먼 훗날, 무녀들이 그녀가 변신한 전기자동차를 타고 다른 신사로 편안하게 이동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루아는 기꺼이 모든 것을 외웠다.[2:1]
루아는 밤낮으로 정비 매뉴얼을 탐독한 끝에, 전기자동차의 모든 세부 구조와 작동 원리를 완벽히 이해했다. 이제 남은 것은 실전이었다. 큰 무녀님과 다른 무녀들은 루아의 첫 변신을 기대하며 신사 마당에 모여들었다. 루아는 심호흡을 하고 전기자동차의 형상을 떠올렸다. 매끈한 차체, 번쩍이는 헤드라이트, 그리고 바퀴 하나하나의 디테일까지. 그녀의 몸이 빛을 내며 변화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루아가 서 있던 자리에는 최신형 전기자동차 한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단순한 모형이 아니었다. 타이어의 깊은 홈부터, 충전 포트, 심지어 내부의 복잡한 대시보드까지 완벽하게 구현된 실제 자동차였다. 루아는 자신의 몸이 강철과 전선, 배터리로 이루어진 거대한 기계가 되었음을 느꼈다. 엔진 대신 심장처럼 뛰는 배터리의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가장 놀라운 것은 운전석이었다. 루아의 몸 안에 작은 분신이 운전자처럼 앉아 있었다. 이 분신은 루아의 의지를 그대로 따르며, 혹시 모를 외부 단속이나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자동차로서 완벽해지기 위해 루아는 또 하나의 관문을 넘어야 했다. 바로 운전면허와 차량 등록이었다. 무녀가 인간 세상의 법을 따라야 한다는 점이 다소 아이러니했지만, 큰 무녀님은 외부 활동의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이때 이슬이 나섰다. 이슬은 능숙하게 루아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루아 본인이 변신한 자동차를 운전하려면, 또 다른 루아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슬은 실제 루아의 모습과 목소리, 심지어는 작은 습관까지 완벽하게 재현했다.
며칠 후, 루아가 변신한 전기자동차의 운전석에는 이슬이 변한 루아가 앉아 있었다. 시내의 운전면허 시험장으로 향하는 길, 이슬은 능숙하게 루아, 즉 자동차를 조작했다. 주차 코스에서는 루아의 몸 구석구석에 심어놓은 센서를 이용해 완벽하게 주차했고, 도로 주행에서는 민첩하면서도 안정적인 주행 능력을 선보였다. 시험관은 감탄하며 루아에게 합격 도장을 찍어주었다.
그 다음은 차량 등록이었다. 이슬이 변한 루아는 차량등록사업소에 루아가 변신한 전기자동차를 몰고 가서 모든 서류 절차를 밟았다. 루아는 자신의 몸에 붙여지는 번호판의 차가운 감촉을 느끼며, 자신이 세상에 정식으로 등록된 자동차가 되었음을 실감했다.
첫 장거리 데뷔 날, 루아는 다른 신사를 방문하는 무녀들을 태우고 출발했다. 출발 전, 루아는 ’연료’를 채우기 위해 신사의 주방에서 온갖 맛있는 음식들을 탐닉했다. 기름진 고기, 달콤한 과일, 따뜻한 국물까지, 흡사 먹방 유튜버처럼 입안 가득 음식을 밀어 넣었다. 그녀의 ’연료’는 바로 음식이었고, 생존을 위해 어떤 음식도 필요치 않은 무녀였지만, 변신한 자동차의 에너지가 고갈되면 그녀의 몸은 본래의 형태로 돌아올 위험이 있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루아는 시속 100킬로미터가 넘는 속도로 질주하는 것에 묘한 쾌감을 느꼈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 바람 가르는 소리, 노면의 미세한 진동까지 모든 것이 새로웠다. 무녀들은 편안하게 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몇 시간이 지나자, 루아는 계기판에 표시되는 ’연료량’이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성능이 저하되는 감각이 밀려왔다.
“이슬님, 연료가 부족해요… 뭔가 먹어야겠어요.”
루아의 다급한 텔레파시가 이슬에게 전달되었다. 이슬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휴게소로 차를 몰았다. 휴게소에 도착하자마자 무녀들은 재빨리 간식거리를 사서 루아에게 가져왔다.
“자, 루아. 핫도그랑 떡볶이 어때? 순대도 있어!”
무녀들이 창문을 통해 운전석에 앉은 루아의 분신의 입으로 음식을 밀어 넣었다. 루아는 떡볶이의 매콤달콤한 맛과 핫도그의 고소함을 느끼며 순식간에 흡수했다. 음식이 몸 안으로 들어오자, 거짓말처럼 떨림이 멈추고 에너지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으음, 역시 맛있네요! 다시 힘이 나는 것 같아요!”
루아는 만족스러운 텔레파시를 보냈고, 무녀들은 웃으며 다시 차에 올랐다. 그렇게 루아는 첫 장거리 운전을 성공적으로 해냈고, 무녀들의 발이 되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녀는 이제 단순한 무녀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 어떤 형태로든 변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임을 증명했다.[2:2]
1년 만이었다. 루아는 이슬이 변신한 단정한 원피스와 카디건을 입고 옛집의 대문 앞에 섰다. 신사에서의 삶은 영원불멸의 존재로서 평온했지만,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어쩔 수 없었다. 갑작스러운 실종에 부모님이 얼마나 애타게 찾으셨을지, 루아는 생각할수록 가슴이 아려왔다. 문득, 이슬의 따뜻한 텔레파시가 루아의 마음을 다독였다.
“걱정 마, 내가 곁에 있어.”
띵동. 초인종 소리에 문이 열리고, 어머니의 놀란 얼굴이 나타났다.
“지은아! 우리 지은이 맞니? 이게 얼마만이니!”
어머니는 루아의 본명인 지은을 부르며 루아를 품에 꼭 안았다. 1년 새 조금 더 어른스러워진 듯한 딸의 모습에 기쁨과 안도가 교차하는 듯했다. 아버지는 말없이 루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따뜻한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부모님의 걱정은 예상보다 더 컸다.
“그동안 어디서 어떻게 지낸 거니? 아무 연락도 없이… 우리는 얼마나 놀랐는지 아니.”
어머니의 질문에 루아는 말문이 막혔다. 신사의 비밀을 발설할 수는 없었다. 그저 ’깊은 산속에서 잠시 몸이 아파 요양했다’는 두루뭉술한 변명만을 늘어놓을 뿐이었다. 부모님의 얼굴에는 여전히 의문과 걱정이 가득했다.
그때였다. 이슬의 목소리가 루아의 머릿속에 울렸다. “루아, 어머니께 내가 어릴 때 살던 동네 이야기를 꺼내달라고 해. 작은 냇가가 있고, 벚나무가 많던 곳 말이야. 그리고 내 친구 미경이 이야기를 꺼내달라고 부탁해봐.”
루아는 이슬의 요청에 의아했지만, 곧 이슬이 뭔가 중요한 것을 시도하려 함을 직감했다. 루아는 조심스럽게 어머니에게 물었다.
“엄마, 혹시 어릴 적에 미경이라는 단짝 친구 있으셨어요? 냇가 옆에 살고 벚꽃이 많았던 동네에서요….”
어머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의 얼굴에 놀라움과 함께 아련한 추억이 떠올랐다.
“미경이라니! 너 그 이름을 어떻게 아니?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네. 응, 그랬지. 내가 어릴 적에 정말 친했던 친구가 바로 미경이었어. 우리가 정말 함께 붙어 다녔는데… 갑자기 이사를 가는 바람에 소식이 끊겼었지. 그 애가 잘 살고 있을지, 늘 궁금했단다.”
어머니는 옛 친구의 이름에 감회에 젖은 듯 미소 지었다. 그때 이슬의 텔레파시가 루아에게 다시 전해졌다. “어머니께 미경이가 가장 아끼던 낡은 인형 이야기를 해달라고 해. 인형의 한쪽 눈이 단추로 되어 있었다는 것도.”
루아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엄마, 미경이가 혹시 한쪽 눈이 단추로 된, 낡은 인형을 되게 아끼지 않았어요?”
어머니는 화들짝 놀라며 루아를 바라보았다.
“세상에!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건 정말 아무도 모르는 우리 둘만의 비밀이었는데! 미경이 그 인형을 정말 아꼈지…. 어디서 들은 거니?”
어머니의 눈에는 확신과 함께 알 수 없는 빛이 스쳤다. 루아는 이슬의 지식을 빌려 부모님의 의심을 지워내고 있었다. 이슬은 루아에게 계속해서 어머니만이 알 수 있는 어린 시절의 추억들을 텔레파시로 전달했고, 루아는 마치 자신이 그 기억을 직접 경험한 것처럼 자세히 이야기했다. 어머니는 루아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서 이슬의 존재를, 신비로운 힘을 조금이나마 엿본 듯했다.
신사의 비밀에 대해 직접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이슬의 오래된 기억을 통해 신님의 능력이 단순한 말이 아니며, 자신의 딸이 보통 존재와는 다른 특별한 존재가 되었음을 어머니는 어렴풋이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루아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힘이 깃들어 있었고, 알 수 없는 지혜가 담겨 있었다.
작별 인사를 할 시간, 어머니는 루아를 꼭 안으며 말했다.
“지은아, 아무튼 건강하게 잘 지내니 정말 다행이다. 그리고… 나중에 미경이를 혹시 만나게 되면, 꼭 나한테 안부 전해달라고 해줘. 네 덕분에 오랜만에 옛 친구 생각도 하고, 정말 반가웠다.”
어머니의 부탁에 루아는 이슬의 텔레파시를 통해 난감함을 느꼈다. 이슬의 머릿속에는 ‘이걸 어째야 하나’ 하는 당혹스러운 반응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자신이 루아의 옷으로 변해 루아의 어머니와 마주하고 있는데, 정작 본인에게 안부를 전해달라는 부탁이라니. 이슬은 난처함에 속으로만 깊은 한숨을 쉬었다. 루아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엄마. 꼭 전해줄게요.”
집을 나서는 루아의 뒷모습은 전과는 달랐다. 부모님의 걱정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했지만, 이슬의 지혜 덕분에 최소한의 이해는 얻어낸 듯했다. 루아는 자신과 이슬, 그리고 다른 무녀들이 지키는 비밀의 무게를 다시 한번 느끼며 신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2:3]
가족과의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신사로 돌아오는 길, 루아는 이슬이 변신한 옷을 입고 걸으면서 문득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전기자동차로 변신했을 때는 운전석에 완전히 옷을 입은 분신이 앉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이슬의 옷이 되었을 때는, 루아 본인이 직접 옷이 되어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왜 어떤 변신에서는 온전한 분신으로 존재할 수 있고, 어떤 변신에서는 신체의 일부로서만 옷을 선택해야 하는 걸까?
“이슬님,” 루아가 텔레파시로 물었다. “문득 궁금해졌는데, 제가 자동차로 변했을 때는 제 분신이 옷까지 완벽하게 입고 운전석에 앉아 있었잖아요. 그런데 지금처럼 이슬님 옷이 될 때는 왜 제가 직접 옷이 되어야 하는 거죠? 왜 제 몸의 일부로서 옷을 선택할 수는 없는 걸까요?”
이슬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음, 듣고 보니 그러네. 나도 그 부분은 미처 생각 못 해봤어. 항상 그래왔으니 당연하다고만 여겼지.” 그녀의 목소리에도 궁금증이 섞여 있었다. “경계 안에서는 무녀복이 우리 몸의 일부처럼 존재하지만, 경계 밖으로 나가면 사라지니 우리가 직접 옷이 되어야 하는 건가… 자동차 운전석에 앉은 분신은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였는데 말이야.”
신사에 돌아오자마자, 루아와 이슬은 큰 무녀님의 분신을 찾아갔다. 차를 마시고 있던 큰 무녀님은 두 무녀의 궁금증 어린 얼굴을 보고 온화하게 웃었다.
“궁금증이 해결되지 않았구나. 자동차로 변한 루아의 분신이 왜 온전히 옷을 입을 수 있었는지, 그리고 너희가 서로의 옷이 될 때 왜 신체의 일부로서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겠지?”
루아와 이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해줘야겠구나.”
큰 무녀님은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태초에 신님께서는 무녀들에게 ‘어떠한 형태든 자유롭게 변형될 수 있는’ 축복을 주셨단다. 처음에는 모든 무녀가 원하는 대로 완벽한 분신을 만들고, 심지어 그 분신에게 옷을 입히는 것까지 가능했지. 너희가 지금 자동차로 변했을 때의 루아의 분신처럼 말이다.”
루아와 이슬은 숨죽이며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곧 문제가 생겼지. 무녀들이 너희처럼 책임감을 가지고 변신을 사용하지 않았던 거야. 어떤 무녀는 분신을 수십 개씩 만들어 마을에 내려가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기도 하고, 어떤 이는 자신의 분신을 시켜 온갖 장난을 치거나 심지어는 나쁜 일을 벌이기도 했어. 본체는 신사에 숨어 있으니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았지. 세상은 혼란에 빠졌고, 신사에 대한 불신이 커져갔단다.”
큰 무녀님의 표정에 아련한 슬픔이 스쳤다.
“신님께서는 깊이 탄식하셨어. 무녀들에게 주신 축복이 오히려 세상을 어지럽히는 도구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신님께서는 무녀들의 변신 능력에 ’제한’을 두시기로 결정하셨단다. 그 제한은 이러했지. ’생명이 없는 무생물로 변신할 경우에만 온전한 분신을 생성하고 그 분신에게 옷을 입힐 수 있다’는 것이었어. 이는 무생물 변신 시에는 본체가 완전히 그 무생물과 동화되므로, 마치 자동차의 운전자가 그 자동차의 일부인 것처럼, 그 분신도 본체의 완전한 통제 아래 놓이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야 무생물 변신 시의 분신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지. 하지만 ’다른 생명체의 의복이 될 때는 본인이 직접 옷이 되어 몸의 일부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제약을 두셨단다. 이는 무녀들이 서로의 책임을 짊어지고, 한 몸처럼 움직이며, 함부로 자신의 능력을 남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지.”
큰 무녀님은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결국 너희가 자동차로 변했을 때 루아의 분신이 온전한 옷을 입고 있었던 것은, 자동차가 무생물이기 때문이고, 이슬의 옷이 되었을 때 루아가 직접 옷이 된 것은, 옷이 되어준다는 것이 다른 생명체와의 결합이기 때문이란다. 이 모든 것은 무녀들의 능력이 세상의 조화를 해치지 않도록 신님께서 내리신 지혜로운 선택이었지.”
루아와 이슬은 큰 무녀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궁금증은 해소되었고, 변신 능력에 숨겨진 깊은 의미를 다시금 깨달았다. 신님의 축복에는 늘 깊은 뜻과 함께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말이다.[2:4]
루아는 정비 매뉴얼을 다 외운 기념으로 큰 무녀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러 갔다. 큰 무녀님의 거처는 언제나처럼 고요하고 정갈했지만, 오늘은 어딘가 평소와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은은한 향내 대신, 묘하게 익숙한 종이 냄새가 섞여 있었다. 큰 무녀님은 평소 앉아 계시던 자리 대신, 창가에 놓인 푹신한 방석에 앉아 무언가에 열중하고 계셨다.
루아가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큰 무녀님의 손에 들린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다름 아닌 두툼한 만화책이었다. 표지에는 역동적인 자세를 취한 소년 검객이 그려져 있었고, 제목은 큼지막하게 “불꽃 검객 카엔”이라고 적혀 있었다. 루아는 자신의 눈을 비볐다. 늘 고고하고 지혜로운 모습만을 보이시던 큰 무녀님이 소년 만화를 보고 계시다니. 이럴 수가!
큰 무녀님은 루아의 시선을 느끼고는 화들짝 놀라 만화책을 무릎 뒤로 숨겼다. 그녀의 뺨에 옅은 홍조가 스치는 것을 루아는 놓치지 않았다.
“아, 루아 왔니? 그… 그게… 이걸 보고 있었구나.”
큰 무녀님은 조금 민망한 듯 목소리를 작게 낮추셨다. 영원불멸의 존재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인간적인 부끄러움이었다. 루아는 웃음을 참으려 애썼다.
“네, 큰 무녀님. 그런데… 만화책을 보고 계셨네요.”
루아의 말에 큰 무녀님은 헛기침을 하며 조심스럽게 만화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
“음… 사실은 말이다, 가끔 이렇게 소년 만화를 읽곤 한단다. 조금 의외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
큰 무녀님은 만화책 표지를 손가락으로 살살 쓸었다.
“이 만화 속 주인공을 보렴. 역경에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며 성장해 나가지. 친구들과 힘을 합쳐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해내고 말이야. 그런 순수하고 뜨거운 열정이… 가끔은 필요하단다.”
그녀는 창밖 멀리 보이는 산을 응시했다.
“오랜 세월을 살다 보면 모든 것이 익숙해지고, 때로는 삶의 의욕마저 희미해질 때가 있지. 세상의 이치와 진리를 깨닫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이렇게 원초적이고 순수한 열정이 메마른 마음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기도 한단다.”
큰 무녀님은 다시 만화책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무녀로서 너희에게 지혜와 평온을 가르치지만, 나 역시 지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작은 원동력이 필요하단다. 이 만화 속 소년들처럼, 때로는 단순하게, 뜨겁게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랄까. 비록 이 신사는 영원히 존재하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도 계속해서 성장해야 하니까.”
루아는 큰 무녀님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 속에서 평생을 살아온 존재의 깊은 고뇌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활력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 느껴졌다. 소년 만화가 단순한 유희가 아닌, 큰 무녀님 자신을 위한 작지만 소중한 활력소임을 루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의 눈에 비친 큰 무녀님은 더욱 인간적이고, 존경스러웠다.[2:5]
신사 한켠의 넓은 마당. 늘 단정한 무녀복 차림에 깔끔한 머리카락을 땋아 내린 명아는 평소처럼 손에 작은 스케치북을 들고 전선 다발이나 알 수 없는 기계 부품들을 꼼꼼하게 그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언제나처럼 명료하고 이성적이었으며, 모든 현상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려는 듯했다. 루아는 그런 명아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명아님, 혹시… 저를 위해 피아노로 변신해 주실 수 있으세요? 어릴 적에 피아노를 배웠는데, 다시 연주해보고 싶어서요.”
명아는 스케치북에서 시선을 떼고 루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에는 약간의 당혹감이 스쳤다.
“피아노요? 음… 전자기기나 통신 프로토콜 같은 분야라면 자신 있지만, 피아노는… 사실 기계적인 구조는 알지만, 음향적인 원리나 건반 하나하나의 미묘한 메커니즘은 제가 익숙한 분야가 아니라서요.”
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변신했던 명아에게서 뜻밖의 약점을 발견한 루아는 내심 놀랐다. 하지만 동시에 명아를 가르칠 수 있다는 생각에 알 수 없는 뿌듯함이 밀려왔다.
“괜찮아요, 명아님!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루아는 활기차게 외치며 명아를 데리고 큰 무녀님이 가르쳐주신 옛 도서관으로 향했다. 먼지 쌓인 책장 사이에서 피아노 구조를 설명하는 오래된 책을 찾아 펼쳤다.
“자, 명아님. 피아노는 기본적으로 건반, 해머, 현, 그리고 울림통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루아는 책의 그림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설명했다. 명아는 평소와 다르게 진지한 얼굴로 루아의 설명을 들으며 스케치북에 피아노 내부 구조를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지만, 이번에는 전자 회로가 아닌 나무와 현의 복잡한 배열을 파고드는 듯했다.
“건반을 누르면 해머가 움직여서 현을 때리죠. 현이 울리면 소리가 나고요. 그리고 이 소리가 울림통을 통해 증폭되는 거예요. 중요한 건 건반 하나하나의 깊이와 속도에 따라 해머가 현을 때리는 강도가 달라져서 소리의 크기와 울림이 미묘하게 변한다는 거예요.”
루아는 손가락으로 허공을 두드리며 건반을 누르는 시늉을 했다.
“특히 이 댐퍼라는 부분이 중요한데, 건반을 누르면 댐퍼가 현에서 떨어져 소리가 나게 하고, 손을 떼면 다시 현에 붙어 소리를 멈추게 하죠. 또, 페달을 밟으면 댐퍼가 현에서 떨어져 소리가 길게 울리거나, 아예 다른 소리가 나기도 해요.”
명아는 루아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스케치북에는 이미 복잡한 해머 메커니즘과 현의 장력 조절 장치가 정교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결국은 이 모든 기계적인 부품들이 조화롭게 움직이며 음향적인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군요. 제가 익숙한 전자 신호와는 다른, 아날로그적인 정교함이군요.” 명아는 드물게 감탄 섞인 목소리를 냈다.
도서관 입구에서는 몇몇 무녀들이 흥미로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늘 똑 부러지게 무언가를 만들어내던 명아가 배우는 입장에 있고, 반대로 늘 배우기만 하던 루아가 가르치는 역할을 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꽤나 신선하고 의외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두 무녀의 열정적인 수업을 지켜보았다.
며칠 후, 마침내 루아와 명아가 신사 마당에 섰다. 명아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루아가 설명해 준 피아노의 모든 구조와 원리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빛을 내며 변하기 시작했다.
강철과 나무의 조화로운 형태가 나타나고, 검은색과 흰색 건반이 정교하게 배열되었다. 마침내, 명아는 육중하면서도 아름다운 업라이트 피아노로 변신했다. 광택이 흐르는 검은 외관과 가지런히 정렬된 건반들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루아는 가슴 벅찬 표정으로 피아노로 변신한 명아 앞에 앉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건반 위에 올렸다. 피아노는 명아 자신이었지만, 동시에 오랜 시간 루아가 그리워했던 악기였다.
루아가 첫 건반을 누르자, 맑고 청량한 소리가 마당에 울려 퍼졌다. 그녀의 손가락 움직임에 따라 명아의 내부 메커니즘이 정교하게 반응하며 다양한 음색과 강약이 표현되었다. 루아는 이내 어릴 적 즐겨 연주하던 멜로디를 떠올리며 연주하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선율이 신사 마당을 가득 채웠고, 다른 무녀들은 숨을 죽이고 그 음악을 감상했다. 명아 또한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소리에 깊은 만족감을 느끼는 듯했다.[2:6]
신사에 겨울이 찾아오자, 산속은 온통 새하얀 눈으로 뒤덮였다. 나뭇가지마다 눈꽃이 피고, 지붕 위에는 두툼한 눈 이불이 쌓였다. 경계 안에서는 영원불멸의 존재들이지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는 무녀들 역시 추위를 느꼈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듯한 한기에 무녀들은 자연스레 한데 모여들었다.
하지만 신사의 겨울은 고통스럽지 않았다. 무녀들의 특별한 능력이 혹독한 추위마저 즐거움으로 바꾸어 놓았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신사 곳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따뜻한 온기였다. 신사 중앙 홀에서는 난로로 변신한 무녀 하연이 붉은 숯불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는 차가운 공기를 단숨에 몰아내고 훈훈함을 선사했다. 무녀들은 난로 주변에 둘러앉아 언 손을 녹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떤 방에서는 보일러로 변신한 무녀 지아가 온돌 바닥을 따뜻하게 데우고 있었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아늑한 열기에 무녀들은 몸을 뉘여 피로를 풀기도 했다. 루아는 난로 옆에 앉아 톡톡 터지는 불꽃 소리를 들으며 겨울의 정취를 만끽했다.
겨울의 별미도 빼놓을 수 없었다. 주방에서는 고소한 냄새가 솔솔 풍겨 나왔다. 그곳에는 뜻밖의 변신체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에어프라이어로 변신한 무녀 채은이었다. 은색의 매끈한 몸체에 디지털 패널까지 완벽하게 구현된 채은은 겨울철 간식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자, 이제 군밤 나갈게요!”
채은의 몸 안에서 노릇하게 구워진 군밤들이 쏟아져 나왔다. 곧이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군고구마와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통닭구이까지 연이어 나왔다. 무녀들은 채은이 구워내는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들을 맛보며 웃음꽃을 피웠다. 루아는 갓 구운 군밤을 호호 불어가며 맛보았다. 일반적인 에어프라이어라면 온도 조절이나 조리 시간 설정에 한계가 있었겠지만, 채은은 자신이 변신한 에어프라이어의 모든 기능을 완벽하게 통제하며 최고의 맛을 구현해냈다.
몇몇 무녀들은 따뜻한 차를 마시며 채은의 에어프라이어 변신에 대해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채은이가 왜 에어프라이어가 되겠다고 했는지 다들 의아해했지. 저 많은 음식들을 한 번에 따뜻하게 만들 수 있으니 겨울에 이만한 변신도 없더라니까.” 한 무녀가 웃으며 말했다.
신사의 겨울은 혹독한 추위가 아닌, 무녀들의 따뜻한 변신 능력과 함께 포근하고 활기 넘치는 계절이었다. 난로와 보일러가 주는 온기, 그리고 에어프라이어가 선사하는 맛있는 음식들 덕분에 무녀들은 추위 속에서도 서로의 온정을 나누며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었다.[2:7]
신사는 세상과 동떨어진 듯 보였지만, 때로는 외부와 교류하며 그 존재감을 드러내곤 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마을 축제였다. 신사 경내에는 외부인이 들어올 수 없었기에, 축제 장소는 신사 입구 근처의 넓은 평지로 정해졌다. 마을 사람들은 신비로운 분위기의 신사 앞에서 열리는 축제를 매년 고대했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무녀들이 선보이는 카구라였다. 신성한 춤으로 신에게 바치는 의식인 카구라는 그 자체로 장엄하고 아름다웠다. 이번 축제에서는 세 명의 무녀가 카구라를 추었다.
주홍은 붉은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화려한 의상으로 변신하여 춤의 중심을 잡았다. 그녀의 몸은 부드러운 비단처럼 펄럭였고, 움직일 때마다 빛을 받아 반짝였다. 주홍의 춤선은 유려하고 절도 있었으며, 그녀의 의상 변신은 춤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 돋보이게 했다.
그리고 춤과 함께 울리는 청아한 방울 소리는 명아가 담당했다. 명아는 작은 방울들로 변신하여 주홍의 손목과 발목에 매달렸다. 그녀는 소리의 강약과 리듬을 완벽하게 조절하며 춤의 흐름을 이끌었다. 때로는 경쾌하게, 때로는 신비롭게 울리는 방울 소리는 명아가 그저 물리적인 형태뿐 아니라 소리의 파동까지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이슬은 카구라를 추는 무녀들의 춤사위에 맞춰 바람처럼 부드럽게 움직이는 얇은 베일로 변신했다. 그녀는 무녀들의 움직임을 따라 허공을 가르며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했다. 때로는 무녀의 얼굴을 살짝 가렸다가 열어 보이며 신비감을 증폭시키기도 했다. 이슬의 베일은 춤의 일부가 되어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감을 드러냈다.
루아는 축제 준비 과정에서부터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녀는 축제에 필요한 물품들을 운반하기 위해 운반용 카트로 변신했다. 튼튼한 바퀴와 넓은 적재 공간을 갖춘 루아는 무녀들이 만든 수공예품, 음식 재료, 장식품 등을 신사에서 축제장으로 나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축제가 시작되자 루아는 또 다른 모습으로 변신했다. 그녀는 축제 안내를 위한 커다란 전광판이 되었다. 다채로운 색깔의 글씨로 축제 프로그램과 장소를 안내하고, 때로는 아름다운 그림을 띄워 축제의 흥을 돋우었다. 물론 루아의 전광판은 신사의 비밀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노출하지 않았다. 그저 축제를 즐기는 마을 사람들의 편의를 돕는 역할에 충실했다.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루아는 밝은 조명등으로 변신하여 축제장을 환하게 밝혔다. 그녀의 빛은 축제의 마지막까지 사람들의 얼굴을 비추며 따뜻한 미소를 짓게 했다. 무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축제를 돕고 있었고, 그들의 변신 능력은 신사의 비밀을 철저히 감춘 채 축제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신비로운 무녀들의 존재를 다시 한번 확인하며, 다음 해 축제를 기약했다.[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