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속 무녀들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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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신의 무녀

도시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굽이굽이 산길을 오르다 보면, 짙은 안개 속에 모습을 감춘 오래된 신사가 나타난다. 이곳은 지도로도 찾을 수 없는, 세상과 단절된 듯한 신비로운 공간이었다. 하지만 아주 외딴 오지라고 하기엔 이따금씩 인적 드문 등산객의 발길이 닿기도 하는, 절묘한 경계에 위치해 있었다. 신사 주변으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가 드리워져 있었는데, 이 경계 안에서는 신사에 소속된 무녀들이 무생물을 포함한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신체를 자유자재로 변형시킬 수 있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일단 경계 안에서 변형된 모습은 경계 바깥으로 나가도 그대로 유지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다시 경계 안으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없었지만, 이 능력 덕분에 무녀들은 더 이상 늙지도, 죽지도 않게 되었다. 생명 유지를 위한 먹고 마시는 행위나 수면과 같은 기본적인 욕구조차 불필요하게 된지 오래였다. 그들은 영원불멸의 존재로서 신사의 수호자가 되어 살아가는 삶을 선택한 이들이었다.

이 신사의 가장 깊은 비밀은 바로 신사 건물들 그 자체였다. 거대한 목조 기둥과 웅장한 지붕, 섬세하게 조각된 문양 하나하나가 실은 아주 오래전 무녀가 된 한 사람의 몸이었다. 다른 무녀들은 그녀를 큰 무녀님이라 불렀다. 큰 무녀님은 자신이 건물이라는 사실이 어린 무녀들에게 혼란을 주지 않도록, 자신의 몸 안에 분신을 따로 만들어 아바타 삼아 활동하고 있었다. 그녀의 분신은 다른 무녀들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신사를 거닐며 무녀들을 지도했고, 신사의 모든 일을 관장했다. 이 충격적인 비밀은 신사 바깥으로 절대 알려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만약 세상에 드러나는 날에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벌어질 것이 분명했기에, 신사는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다. 신사 안에는 오직 무녀만이 들어올 수 있었고, 이 비밀은 철저하게, 아주 꼼꼼하게 숨겨지고 있었다.


소녀는 평범한 도시에서 살고 있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그때였다. 맑은 하늘에서 한 줄기 빛이 쏟아지더니, 소녀의 머릿속에 또렷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신사로 오라. 너의 운명이 그곳에 있다.”

처음에는 환청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날이 갈수록 선명해졌고, 소녀의 마음속에 강렬한 이끌림을 새겼다. 결국 소녀는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고,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무작정 지도를 찾아 나섰다. 며칠 밤낮을 헤매고, 굽이굽이 산길을 오르내린 끝에, 소녀의 눈앞에 안개에 휩싸인 신사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신사의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소녀의 온몸을 감싸는 기묘한 기운과 함께 환영의 목소리는 거짓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신사에 들어서자, 흰 옷을 입은 여인들이 소녀를 맞이했다. 그들은 소녀가 오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소녀를 무녀들의 거처로 안내했다. 소녀는 큰 무녀님의 분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정식으로 무녀가 되겠다는 서약을 했다. 서약을 마치자마자 소녀의 몸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손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알 수 없는 에너지가 흘러넘치는 것을 느꼈고, 온몸의 감각이 예민해지는 것을 경험했다. 소녀는 이제 더 이상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신성한 의식이 끝난 후, 소녀에게는 루아라는 새로운 이름이 주어졌다. 루아는 다른 신참 무녀들과 함께 신사의 규칙과 무녀로서의 삶에 대해 배웠다. 그녀는 경계 안에서 자신의 몸을 자유롭게 변형시키는 훈련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손가락 하나를 나뭇가지로 바꾸는 것조차 어려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익숙해졌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동료 무녀와의 짝꿍 제도였다. 루아는 자신과 함께 외부 활동을 나갈 동료 무녀를 배정받았다. 그들은 외부 활동 시 서로의 옷으로 변형되어 한시도 서로에게서 떨어지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한 명이 다른 한 명의 옷이 되어 신체의 일부를 이루는 형태로, 두 무녀는 하나의 존재처럼 움직여야만 했다. 이는 무녀들이 외부 세계에 신사의 비밀을 노출하지 않으면서도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루아의 짝은 차분하고 지혜로운 무녀, 이슬이었다. 이슬은 루아의 검은 머리끈이 되고, 루아는 이슬의 옷깃이 되는 식으로 서로의 존재가 되어갔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에게 스며들어 하나의 그림자처럼 신사 안팎을 오가며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할 준비를 마쳤다. 루아는 이제 막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이었다.[1:1]


루아는 신사의 일상에 점차 익숙해지고 있었다. 신성하고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도, 무녀들의 삶은 생각보다 훨씬 실용적이고 유연했다. 특히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무녀들이 경계 안에서 자신의 몸을 변형하는 방식이었다. 단순히 동물이나 식물로 변하는 것을 넘어, 무녀들은 필요에 따라 다양한 생활용품으로 변신해 신사 내부의 불편함을 해소하고 있었다.

어느 날, 루아는 큰 무녀님의 분신과 함께 신사 깊숙한 곳에 있는 문서 보관실을 정리하고 있었다. 고서와 두루마리가 가득한 방 한쪽에서 낡은 책장 여러 개가 눈에 띄었다. 이 책장들은 다름 아닌 무녀 지수의 변신이었다. 지수는 신사의 역사와 지식을 보관하는 데 필요한 책장으로 변해 있었다. 그녀는 루아에게 얇은 책갈피로 변한 자신의 손가락을 이용해 특정 서책을 찾아주기도 하고, 때로는 책장 칸을 자유자재로 늘려 더 많은 책을 수납할 수 있도록 돕기도 했다. 루아는 지수가 단순히 책장으로 변한 것이 아니라, 책장의 구조와 수납 효율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변신했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지수의 변신이 단순한 형태 변화를 넘어선, 기능적인 완성도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 감탄했다.


신사의 밤은 고요했지만, 때로는 뜻밖의 소음이 들려오기도 했다. 바로 무녀들이 휴식을 취하는 공간에서였다. 그곳에는 명아라는 무녀가 있었는데, 그녀는 종종 텔레비전으로 변신했다. 루아는 처음에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산속 깊은 신사에 텔레비전이라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명아가 텔레비전으로 변신하면, 화면에서는 외부 세상의 소식이 흘러나왔다. 뉴스부터 드라마, 심지어는 애니메이션까지. 무녀들은 명아가 보여주는 영상들을 통해 세상과 단절되지 않고 외부의 정보를 얻고 있었다. 루아는 명아가 그저 화면을 띄우는 것이 아니라, 마치 실제 텔레비전처럼 채널을 바꾸고, 소리를 조절하며, 때로는 화면의 비율까지 능숙하게 조절하는 것을 보았다. 한번은 화면이 순간적으로 끊기자, 명아는 “잠시 수직 귀선(vertical blank) 주파수가 안 맞았네요. 제가 조절했어요.”라고 중얼거렸다. 또 다른 날에는 갑자기 화면이 멈추자, 그녀는 “음, ATSC 프로토콜이 불안정했나 봐요. 바로 잡을게요.”라며 능숙하게 오류를 해결하기도 했다.

루아는 명아의 말뜻은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녀가 텔레비전이라는 기계의 작동 원리까지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명아의 변신은 단순히 모양만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텔레비전의 본질적인 기능과 기술적 속성까지 구현하는 수준이었다. 명아는 무생물 변신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무녀들이 단순한 옷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편리한 생활을 위한 다양한 물품들로 변신하는 모습은 루아에게 큰 흥미를 안겨주었다. 그녀는 경계 안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자신의 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언젠가 자신도 명아처럼, 지수처럼, 단순한 형태를 넘어선 기능적이고 실용적인 변신을 할 수 있을까? 루아는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며 설렘을 느꼈다.[1:2]


어느 맑은 오후, 루아는 큰 무녀님의 분신과 함께 신사 안뜰을 거닐고 있었다. 햇볕이 잘 드는 마루에 앉아 차를 마시던 중, 루아는 문득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큰 무녀님, 어째서 신께서는 이토록 특별한 경계를 만드신 건가요? 저희가 이렇게 자유롭게 모습을 바꿀 수 있도록, 그리고 영원히 살 수 있도록 하신 이유가 궁금해요.”

큰 무녀님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의 눈빛은 오래된 신사의 역사만큼이나 깊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했다.

“루아, 이 경계는 단순히 너희에게 특별한 능력을 주기 위함이 아니란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그 변화의 물결 속에서 신사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선 특별한 지혜와 힘이 필요했지.”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를 응시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고, 그 한계 속에서 많은 것을 잊고 잃어버리게 된단다. 하지만 신사는 세상의 근원적인 지혜와 영적인 균형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 이를 위해선 시대를 초월하여 존재하며, 어떠한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는 존재들이 필요했지.”

큰 무녀님은 다시 루아를 바라보았다.

“너희 무녀들은 이 경계 안에서 물질의 속박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게 됨으로써, 단순히 육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란다. 이는 곧 세상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고, 필요한 정보를 얻으며, 때로는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채로 신사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되는 것이지. 예를 들어, 지수가 책장이 되어 지식을 보존하고, 명아가 텔레비전이 되어 세상의 흐름을 읽듯이 말이다. 너희는 영원히 존재하며 신사의 지혜를 이어갈 존재들이야.”

그녀의 목소리에는 깊은 신뢰와 책임감이 묻어 있었다.

“이 경계는 신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무한한 가능성이자, 동시에 신사의 존재 이유를 수호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도구인 셈이지. 너희가 영원한 삶을 얻은 것도, 죽음과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신사의 역할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루아는 큰 무녀님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계가 가진 의미가 단순히 능력 부여를 넘어선, 더 깊고 신성한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이 속한 신사와 무녀로서의 삶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얻게 되었다.[1:3]


루아는 이슬이 외출 준비를 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녀복은 경계 안에서는 마치 피부처럼 몸의 일부가 되어 존재했지만, 경계를 벗어나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외부 활동을 할 때는 늘 다른 무녀가 옷으로 변신해 주어야 했다. 오늘은 루아가 그 역할을 맡기로 한 날이었다. 이슬은 고맙다는 듯 루아에게 살짝 미소 지었다.

“루아, 잘 부탁해.”

루아는 숨을 고르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슬이 입을 캐주얼한 옷, 따뜻한 크림색 니트와 부드러운 청바지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단순한 형태가 아니라 질감, 옷의 주름, 심지어는 섬유 한 가닥 한 가닥까지 생생하게 상상했다.

그녀의 몸이 변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발끝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되었다. 발가락이 사라지고, 발등이 매끈하게 펴지며 부드러운 니트의 밑단으로 변해갔다. 종아리와 허벅지는 천천히 청바지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푸른색 데님 특유의 거친 듯 부드러운 질감이 느껴졌다. 허리 부분은 자연스럽게 벨트 고리와 주머니의 형태로 자리 잡았다.

몸통은 니트가 되었다. 루아의 피부는 따뜻한 크림색 실의 뭉치로 변했고, 세포 하나하나가 촘촘한 니트 조직으로 재구성되는 감각이 밀려왔다. 팔은 소매가 되어 길게 늘어졌고, 손가락은 부드럽게 감기는 소맷단이 되었다. 목은 니트의 목 부분으로, 머리카락은 흘러내리는 실타래처럼 자연스럽게 마무리되었다.

변형이 완료되자, 루아는 자신이 온전히 한 벌의 옷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이슬이 천천히 루아, 즉 크림색 니트와 청바지를 집어 들었다. 루아는 순간적인 어지럼증을 느꼈지만, 곧 익숙한 옷의 감각이 그녀를 감쌌다. 이슬의 손길이 느껴지고, 그녀의 몸에 옷으로서 입혀지는 순간, 루아는 마치 또 하나의 피부가 된 듯한 기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루아는 옷이 되었지만 오감은 여전히 생생했다. 이슬의 피부에 닿는 촉감,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바스락거리는 소리, 그리고 이슬이 걸을 때 느껴지는 미세한 진동까지 모두 전달되었다. 그녀는 이슬의 시선을 통해 세상을 볼 수 있었고, 이슬의 귀를 통해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루아, 괜찮아?”

이슬의 목소리가 루아의 머릿속에 또렷하게 울렸다. 텔레파시였다. 루아가 옷으로 변형된 순간부터, 둘 사이에 말 없는 소통의 통로가 열린 것이었다.

“네, 이슬님. 전혀 불편하지 않아요. 오히려 이렇게 가까이서 세상을 보니 색다른데요.”

루아의 생각이 이슬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이슬은 고개를 끄덕이며 신사의 문을 나섰다. 루아는 이제 이슬의 일부가 되어 외부 세계로 발을 내디뎠다. 그녀는 옷으로서 이슬을 보호하고, 이슬의 눈과 귀가 되어 외부의 정보를 함께 감지할 준비를 마쳤다.[1:4]


신사 밖으로 나선 이슬은 평소처럼 산길을 따라 걸었다. 루아는 이슬의 옷이 되어 그녀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생생하게 느꼈다. 숲길의 촉촉한 흙냄새와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이슬의 오감을 통해 루아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모든 것이 신선하고 경이로웠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좁은 산길을 내려가던 이슬이 갑자기 발을 헛디뎠다. “앗!” 짧은 비명과 함께 이슬의 몸이 휘청했고, 루아가 변신한 청바지가 순식간에 거친 흙바닥에 쓸렸다. 날카로운 나뭇가지가 바지를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루아는 마치 자신의 피부가 긁히는 듯한 섬뜩한 감각에 온몸이 움츠러들었다. 다행히 이슬은 넘어지지 않았지만, 루아의 마음속에서는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슬님, 방금… 제 몸이 긁혔어요!”

루아의 당황스러운 외침이 이슬의 머릿속에 울렸다. 이슬은 피식 웃으며 걸음을 멈췄다. “괜찮아, 루아. 옷은 원래 그런 거야. 더러워지기도 하고, 긁히기도 하고.”

이슬의 말에 루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수난은 이제 시작이었다. 산길을 벗어나 작은 마을 어귀에 다다르자, 갑자기 튀어나온 강아지 한 마리가 이슬의 다리에 대고 킁킁거렸다. 이내 강아지는 루아가 변신한 청바지에 오줌을 갈겼다.

“악! 이슬님! 방금… 제 몸에 뭔가 따뜻하고 축축한 게…!”

루아는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다행히 소리 없는 외침으로 이슬에게만 전달되었다. 이슬은 당황한 기색 없이 발로 강아지를 살짝 밀어내고는 고개를 숙여 청바지를 살폈다. “아, 저런. 괜찮아 루아, 이건 금방 닦으면 돼.” 이슬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아무렇지도 않게 루아의 몸, 즉 청바지에 묻은 강아지 오줌을 닦아냈다. 루아는 닦여지는 감각에 몸서리를 쳤다. 옷이 되어 이런 일을 겪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마을 시장에 들어서자 더욱 당황스러운 일들이 이어졌다. 이슬이 길거리 음식 노점상 앞에서 멈춰 섰다. 고소한 기름 냄새와 매콤한 양념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슬이 꼬치 하나를 집어 들고 한입 베어 물었다. 그때, 붉은 양념 한 방울이 튀어 루아가 변신한 크림색 니트에 뚝 떨어졌다.

“아아악! 이슬님! 제 몸에! 얼룩이…!”

루아는 거의 절규하듯 외쳤다. 눈으로 보니 선명하게 박힌 붉은 점이 너무나도 끔찍했다. 이슬은 루아의 당황스러움을 느끼고는 작게 웃었다. “이런, 미안해 루아. 괜찮아, 집에 가서 빨면 돼.” 이슬은 아무렇지 않게 다시 꼬치를 먹기 시작했다.

루아는 혼란에 빠졌다. 신사 안에서는 영원불멸의 존재로, 긁히거나 더러워질 염려 없이 완벽한 형태를 유지했다. 그런데 옷이 되자마자 긁히고, 오줌을 맞고, 얼룩이 지는 이 모든 경험은 그녀에게 큰 충격이었다. 옷이라는 존재가 겪는 ’수난’을 온몸으로 체감하며, 루아는 자신의 변신 능력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얻는 동시에, 예상치 못한 현실적인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1:5]

마을을 벗어나 신사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루아는 여전히 당혹감을 떨칠 수 없었다. 니트에 묻은 얼룩과 청바지에 묻은 강아지 오줌, 그리고 긁힌 자국들이 내내 신경 쓰였다. 옷이라는 형태로 겪은 일련의 사건들이 그녀에게는 마치 영혼에 상처를 입은 것만 같았다.

“이슬님… 이거 정말 괜찮은 건가요? 제 몸이… 이렇게 더러워지고 상처 입는 게….”

루아의 불안한 목소리가 이슬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이슬은 고요한 산길을 묵묵히 걷다가 루아의 옷깃, 즉 루아가 변한 니트 부분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루아, 네 마음 충분히 이해해. 처음엔 다 그래.”

이슬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루아의 당혹감을 어루만지는 듯한 따뜻함이 배어 있었다.

“나도 너처럼 처음엔 많이 놀랐지. 몇 년 전이었나… 그때는 내가 찻잔으로 변해서 큰 무녀님 시중을 들었었어.”

루아는 이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찻잔이라니, 또 어떤 일이 있었을까.

“큰 무녀님께서 마당에서 차를 드시는데, 갑자기 돌풍이 불었지 뭐야. 그 바람에 내가, 그러니까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졌어. 깨지는 순간, 온몸이 산산조각 나는 듯한 고통이 느껴지더라. 정말 아팠지. 내 몸이 수백, 수천 개의 파편으로 흩어지는 감각은… 아직도 생생해.”

루아는 상상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졌다. 유리 조각으로 변했다가 깨진다니, 그것은 영원불멸의 존재에게도 극한의 경험일 터였다.

“그때 큰 무녀님께서 내 조각들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주워 담으셨어. 가장 큰 유리 조각들을 신사에 가지고 돌아오셨지. 그리고 신사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거짓말처럼 내 몸이 다시 하나로 합쳐지더라. 깨진 흔적 하나 없이 완벽한 찻잔의 형태로 말이야. 그리고 곧 원래 내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

이슬은 말을 마치고 루아가 변한 니트의 소매 부분을 살짝 당겼다.

“우리가 경계 밖에서 어떤 모습으로 변하든, 어떤 일을 겪든, 신님의 축복은 늘 우리와 함께 한단다. 경계 안으로 돌아오는 순간, 우리는 본래의 완벽한 모습으로 되돌아오지. 그러니 걱정하지 마. 네 몸은 멀쩡할 거야.”

이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신사의 경계가 느껴졌다. 루아는 순간적으로 눈앞이 휘청이는 것을 느꼈고, 곧이어 온몸을 감싸고 있던 니트와 청바지의 감각이 사라졌다. 눈을 뜨자, 그녀는 다시 본래의 무녀복을 입고 있었다.

루아는 재빨리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다. 긁혔던 다리도, 오줌이 묻었던 허벅지도, 양념이 튀었던 가슴 부분도, 그 어떤 흔적도 없이 깨끗하고 완벽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루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신기함에 이슬을 바라보았다. 이슬은 루아의 마음을 읽었는지 미소를 지었다.

“봐, 내가 말했잖아?”

루아는 경계의 신비로움과 신님의 축복에 다시 한번 경외심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이 겪은 작은 수난들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깨달으며, 옷이 되어 외부를 경험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었다.[1:6]